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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푸른섬선교정보 > Mission Research 등록일 2006-09-29
작성자 관리자 (admin)
악령의 땅, 전쟁의 땅 아프가니스탄
영적 도해라는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적도해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를 보면 악한 영이 특정 지역을 특별하게 장악을 한다는 개념이 반드시 잘못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도해 개념을 섣부르게 말하고 적용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아마도 사탄의 졸개들은 세계를 이리 저리 다니면서 마치 한때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왕성하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고, 지구를 이리 저리 분할하여 특정지역을 통치하려고 드는지도 모른다. 아뭇든 영적도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섣부르게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미묘한 이슈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 단지 관념적인 차원에서 찬반을 논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의 대적인 사탄은 어둠의 세계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단이 가장 잘하는 일은 자신이 지나간 흔적을 은폐하는 일이다."

지구상에는 아주 특별한 고통으로 인해서 특별히 힘들어 하는 곳이 있다. 또 어떤 곳은 보이지 않은 어떤 힘에 의해서 잘 보호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 있다. 예를 들어서 태국같은 나라가 그 유구한 역사를 두고도 단 한번도 외세에 의해 정복당한 적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태국 사람들은 특별한 신적 존재가 자신들의 땅을 단단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믿고 있고, 그 믿음은 그럴 듯해 보인다. 또 일본도 2차대전에서 패하여 1945년부터 잠시 미국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다. 지금 이 두나라는 모두 기독교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을 허용하고 있지만, 이 두 나라 국민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좀처럼 점령당하지 않는 땅 가운데 대표적인 또 한 곳을 들자면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은 이상할 정도로 증오와 잔인함이 온 나라에 가득한 곳이다. 그 정도와 양태가 너무 심해서 사탄이 특별하게 이 곳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곳이다. 때문에 약 2,600 만 명이 살고 있는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안에서 기도제목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찌기 아프가니스탄 땅을 침공했던 알렉산더왕은 이후 이 곳을 침공한 모든 점령자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것은 척박한 기후와 험준한 지형, 그리고 싸우기를 즐긴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호전적인 원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이다." 전쟁사학자인 레이몬드 칼라한의 말이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은 3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 지역 정복에 나섰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부패로 사양길에 접어든 페르시아 왕국의 일부분 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지금의 칸다하르라는 도시를 건설한 사람이 알렉산더대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알렉산더는 아프가니스탄을 그리스의 일부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했고, 그의 아프가니스탄 정벌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점령군은 피정복자들의 조직적이고 거센 반란과 항전으로 인해 심한 고생을 해야 했다. 알렉산더는 그 와중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의 딸인 옥씨아르테스와 결혼하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부인이 된 옥씨아르테스와 그녀의 부친은 그리스 정복자들에게 저항하지 말도록 지역의 족장들을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이처럼 알렉산더는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동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하게 장악하여 지배하는데는 실패했다.

좀더 시간이 흐른 AD 400 년 경에는 백계 훈족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510년에는 페르시아가 다시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다. 과거 알렉산더왕이 이끌던 그리스 점령군이 그랬던 것처럼, 페르시아의 점령군들도 아프가니스탄 부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652년에는 아랍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이슬람의 씨를 뿌렸다. 그리하여 첫째 밀레니엄이 끝날 때 쯤에는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1219년부터 1221년 사이에는 겐지즈칸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관개시설을 완전히 파괴했고, 이로 인해 그런대로 비옥하던 땅은 지금처럼 척박하게 변해 버렸다. 당시의 침공으로 인해 척박해진 땅은 지금도 그대로 아프간인들에게 고통으로 남아 있다. 요즘도 가뭄만 심해지면 국토의 상당부분은 경작 불가능한 지대로 변해 버린다. 이처럼 쓸모 없고 험준한 땅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아프가니스탄은 자주 많은 침공을 받았다. 그 이후에도 아프간을 침공하는 행렬은 계속 밀려들어왔다. 이처럼 잦은 침공과 땅의 척박함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의 삶의 환경은 최악의 상황으로 변해갔다. 완전히 거덜났다해도 좋을 정도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땅은 19세기 들어서면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외세의 침략이 없는 대신에 그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는 비참하다.

악령과 전쟁의 땅, 아프가니스탄(2)

아프가니스탄은 천연자원이랄 것이 별로 없는 나라이다. 농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지역을 점령한 세력들은 아편을 제외하고는 걷어갈 것이 없는 별로 쓸모 없는 땅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은 목축을 위한 초지를 제공해 주는 정도 이외에는 별 쓸모가 없는 땅이다. 200년 전쯤 대영제국이나 짜르시대의 러시아가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강대국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인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중요한 무역로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공략을 시작한 것은 1838년이었다. 영국의 통상사절들이 카불로 들어와 당시의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였던 아미라 도스트 무함마드에게 통상을 요구하면 사실상 협박을 했다. 아미르는 이를 거부했고, 영국은 이를 핑계로 군대를 파견하여 아미르 정부를 축출하고, 영국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영국의 이 지역 지배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대대적인 항전을 개시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영국이 결국 철수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700 명의 영국군과 3,800 명의 인도인 용병들의 생명이 눈쌓인 산악지대에서 사라져 갔다. 눈쌓인 고산지대를 90마일이나 행군한다는 것은 영국군에게는 죽음의 행진이었다. 그리고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는 아프가니스탄의 최고통치자의 권좌에 복귀했다.

1878년에는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의 아들이 권좌를 이어 받았다. 그는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의 지원을 받아 다시한번 카불을 침공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주둔을 인정하는 조약에 강제서명토록 했다. 무력에 못이겨 외교문서에 굴욕적인 서명을 해야 했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다시한번 항전에 나섰다. 그들은 그들 방식의 독특한 항전을 통해 영국군과 그들을 돕는 인도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항전기간동안 무려 6만 명의 아프간 전사들이 사망했다. 이들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이슬람 성직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항전을 영국의 '이교도'를 상대로 한 '지하드'로 규정했다. 그들은 가지즈라고 불리는 암살단을 조직하고, 암살대상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상대방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암살을 감행했다. 영국은 아프간인들의 강력한 저항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프간을 그들 손으로 장기간 직접 통치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의 손자를 왕위에 앉히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1919년에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완전 독립을 보장하는내용의 협약서에 서명했다. 그후 아프가니스탄의 새 지도자인 아마놀라는 소련과 새로운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입장에서는 소련이 영국보다는 훨씬 유익하고 실리적인 존재였다. 1873년에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확정했고, 다른 중앙아시아 지역은 합병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영토를 존중해 줄 것을 약속했다. 소련의 첫 통치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를 배격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었다. 양국간의 이와 같은 우호관계는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변함 없이 유지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라이벌인 미국과 관계를 증진시키기 시작했고, 몇 차례 쿠데타를 겪으면서 소련과의 관계가 예전같지 않게 되었다. 또 내부적으로도 정부에 반발하는 반군세력과 정부군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등 혼란을 거듭하자, 소련의 입장에서는 아프간 내부를 교통정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1979년 친소정부가 붕괴되자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직접 통치를 모색하게 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는 소련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1980년대, 미국과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은 소련을 추종하는 위성정부에 맞서 싸우는 이른 바 "자유의 전사들"에게 엄청난 물량의 지원을 해 주었다. 10년 간의 게릴라 전쟁을 통해 소련은 소련군 헬기가 미국이 제공한 반군의 스팅어 미사일에 격추되는 치욕을 겪었고, 결국 1989년에 소련군 철수를 단행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의 흐름을 간단히 살펴 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역사가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며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즉, 일상적인 내전으로 갈갈이 분열되어 있지만, 외세의 침공이 있으면 무섭게 단결하여 항전하는 모습이다. 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싸움을 즐긴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정도로 호전적이라는 점이다. 과연 아프가니스탄은 영적으로 저주 받은 땅인가 악령이 지배하는 땅인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대해서 함부로 그렇다, 아니다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역사의 흐름만을 놓고 볼 때, 아프가니스탄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불행을 겪어온 불행한 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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