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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단체 > 등록일 2012-05-29
작성자 박승남 (snpark)
주님, 선교사를 잘 돌보는 AIM과 사역하고 싶습니다!
강병권 선교사 (AIM Korea Director)
여름에는 소나기로 불어난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겨울에는 연과 팽이, 눈썰매를 만들어 놀던 충청도 시골 마을을 떠나 서울로 올라 온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어려서부터 삼촌을 따라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단지 출석상이나 크리스마스 선물 때문에 열심히 교회를 다녔었다. 막상 서울로 전학을 오니 동네에도 학교에도 아는 친구가 없어 외로운 때에 나를 반겨 주는 인근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성경 말씀을 읽다가 마침내 내가 큰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구세주로 영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집안의 장손이란 이유로 어려운 가정 형편과는 상관없이 무엇이나 맘대로 하고 지내는 거친 소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 나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의 모든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어느 날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성경을 재미있게 풀어서 전하시는 목사님을 보고 ‘나도 저 목사님처럼 성경을 재미있게 설교하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의 생각과 함께 ‘목사가 되라.’는 주위의 권유로 나는 총신대 신학과에 진학을 했다.

군 전역 후 대학 2학년에 복학해서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은 한 동아리(Mission Language Training Club, MLTC)를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다. 동아리는 매일 수업 전에 모여 영어 훈련을 하고, 점심시간이면 선교사님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3장 5~7절의 말씀을 통해 국내에서 목회하려고 준비하던 나를 선교사로 부르셨다. 당시 손영준 목사님이 선교사 훈련을 위해 시작하신 Missionary Training Institute (MTI)가 있었는데, 나는 그 곳에 들어가서 선교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MTI에는 미국, 호주에서 오신 여러 강사들(대부분은 은퇴하신 선교사님들)이 훈련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Africa Inland Mission(AIM)에서 오신 Alan & Coleta Checkley 선교사 부부가 있었다. 나는 그 분들이 나누는 선교사의 삶과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 비전에 큰 도전을 받았다. “주님, 제가 선교의 노하우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을 잘 돌보는 이 AIM과 사역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고 AIM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다.

1895년 어느 날, 한 청년이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리빙스톤 무덤 앞에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그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아프리카 내지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 비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고 동역할 6명의 선교 헌신자를 얻게 된다. 드디어 1895년 8월 17일 뉴욕을 출발하여 케냐 몸바사에 도착한다. 그가 바로 AIM의 창시자 Peter Cameron Scott이다.

AIM 창시자 피터 카메론 스콧(Peter Cameron Scott) - 앞 줄 좌측 두번째


그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머물며 사역했지만, 그는 ‘주님의 다른 양’을 찾아 대륙의 중심인 챠드까지 들어가는 비전을 갖고 내지로 향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나 풍토병과 말라리아로 아프리카에 묻힌 한 알의 밀알이 된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땅을 밟았고, 또한 그 땅에 묻혔다.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1,000여명의 AIM식구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주님의 다른 양’을 찾아 그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를 세우는 비전(Christ-centered Churches among All African Peoples)을 실천하고 있다.

나와 아내도 AIM의 한 식구가 되어 1992년 9월 나미비아 땅을 밟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곳은 나미비아 북쪽 앙골라 국경에 있는 룬두(Rundu)라는 작은 국경 도시였다. 도시라고 해야 작은 읍 정도였는데 그 곳에는 앙골라 내전을 피해 내려온 많은 난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본국 앙골라에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믿는 이들이었고, 룬두를 중심으로 이주한 마을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교회가 많아지자 목회자들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 필요를 AIM선교부에 알리게 되었다. 선교부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룬두에 Evangelical Bible Institute(EBI)라는 목회자 훈련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역지에 간 우리는 AIM의 정책(2년간 현지 언어 습득)에 따라 앙골라 피난민 부족들의 공용어인 Luchazi(루차지)어를 배웠다. 은퇴하기 전 앙골라에서 사역하셨고 그 언어를 완벽하게 하시는 한 노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루차지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루차지 성경과 사전을 놓고 영어 공부하듯 초임 선교사였던 우리 부부는 언어공부에만 전념했다. 6개월 후 나는 루차지어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루차지어에 진보가 있었다.

우간다 음발레 근교에 있는 나마탈라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주는 장면


6년이 지나면서 사역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교회들이 개척되었고, 그 교회마다 필요한 목회자들이 배출되었고, 또한 나름대로 지역교회의 정책과 행정을 잘 세워 나가는데, 우리 같은 선교사가 더 필요할까?’라는 질문이었다. 이를 놓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Reformed Theological College(RTC)로 옮겨 주셨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RTC에서 교수와 목회 사역을 했다. 우리 부부는 차기 사역으로 한 미전도 종족으로 갈 것을 준비하면서 안식년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AIM Korea 본부 사역을 준비하고 계셨다.

글 : 강병권 선교사 (director.kor@aimint.net)
편집 : 미션매거진 박승남 (kcmps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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