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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학자료 > 논문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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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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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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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ad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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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침례교 역사에 나타난 선교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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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열 교수 (침신대 선교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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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2008년은 한국침례교해외선교회(FMB)가 창립한 지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FMB가 이제 청년기를 맞이하여 ‘VISION 2010’을 착실히 시행하며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데 사실 한국침례교회의 선교역사는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이 한국에 도착한 1889년부터 시작된다. 약 120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침례교회는 그동안 선교하는 교단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FMB는 현재 50개 국가에 608명의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서 한국침례교회는 4.5 교회당 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2010년까지 100개 이상의 미전도종족과 관문도시에 1천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예정이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긴 한국침례교회의 역사를 선교적인 관점에서 시대 구분한다면 대략 5기로 나뉠 수 있다. 제1기는 1889년부터 1905년까지 선교 초창기로 펜윅 선교사가 오늘날 창의적접근지역(CAN) 같은 한국에 어떻게 정착했는지 살펴 볼 것이고, 제2기는 펜윅이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창립한 이후부터 주님의 품으로 갔던 1935년까지의 시기로 단신(單身)의 몸으로 왕성하게 선교활동을 했던 그의 업적들을 평가할 것이다. 제3기는 1936년부터 1987년까지 거의 50년 세월동안 한국침례교회가 장기간 선교 침체기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 이유를 밝힐 것이며, 제4기는 FMB가 창립되던 1988년부터 2005년까지로 한국침례교회가 선교 도약기를 맞이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 제5기는 한국침례교 선교사 파송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침례교회는 선교부흥을 맛보고 있는데 그 이유를 찾아볼 것이다. 본고(本稿)는 한국침례교회 120년의 선교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각 시대별 선교특징을 살펴보고 장ㆍ단점을 평가하며 앞으로 한국침례교회가 지향해야 할 선교정책을 제안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I. 초창기 시기의 선교 (1889-1905)
펜윅 선교사가 1889년 방한했을 당시 한국의 모습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소말리아와 흡사하였다. 이들 국가들은 한결같이 선교활동에 있어서 강력반대국가로 E 등급을 받고 있어서 여권에 입국하였다는 흔적이 있을 경우 정부로부터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된다. 19세기 말 한국의 정황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으로 쉽게 선교의 문을 두드릴 수 없는 곳이었고 순교도 감수해야 했다. 당시 한국은 현재 창의적접근지역처럼 선교사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곳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생명을 내어 놓는 결단이 있어야만 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장하여 오히려 창의적접근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120년 전 펜윅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와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적응했는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1. 초창기 시기의 선교특징
선교사의 초기정착은 선교의 향방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허버트 케인(Herbert Kane)은 초기정착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건강, 방향성, 성경교육 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초기정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선교사 소명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선교지에서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펜윅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19세기 말 최고의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를 나이아가라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에서 만나 잘나가던 철물 업을 그만두고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선교사 가운데는 소명이 분명치 않은 자들도 있다. 연구자는 그 동안 세 종류의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첫 째는 자녀에 따라서 사역지를 옮기는 경우이다.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따라 사역지나 선교 방향도 바꿔지는 경우이다. 온통 자녀교육에만 관심을 갖는 선교사라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선교사 자신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경우이다. 이슬람권이나 사회주의권이라는 핑계 하에 학생신분으로만 비자를 유지하여 학위를 추구하는 선교사이다. 세 번째로 한 영혼의 열매를 주님께 바치려는 선교사이다. 현지인 한 명을 얻기 위해 생명도 아까와 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선교사를 말한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푯대를 향하여”(빌3:14) 달려가는 선교사인데 펜윅이 바로 그러했다.
펜윅이 처음 한국에 입국하였을 때는 26세의 젊은 싱글 선교사였지만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903년에 힌즈 (Fanny Hinds) 여사를 만나 결혼하였는데 펜윅과 힌즈 여사는 두 사람 모두 선교에 올인하는 사람이었다. 펜윅 못지않게 힌즈 여사는 종전의 학교선생의 경력에 힘입어 원산성경학원에서 여성들을 위한 제자훈련에 탁월한 선교사였다. 그렇다. 선교사 소명은 부부가 함께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선교사들 사이에는 간혹 이런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위 부인 선교사들이 남편들의 소명에 무임승차하려는 ‘1+1’ 자세를 버리고 한 영혼을 주님께 드리려는 신앙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현지 언어 습득이 탁월하였다. “선교 시작은 현지 언어 습득부터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선교사가 현지 언어를 정복하지 못하면 사역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펜윅은 현지 언어 습득에 뛰어난 선교사였다. 그가 한국에 내한(來韓)한지 2년이 지난 1891년에 자신의 언어선생인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한글과 한문을 겸용한「요한복음전」을 번역 출판하였고, 1919년에는 토착화 성경번역으로 널리 알려진 원산번역「신약젼셔」를 10월 18일에 출간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899년에는 전천년주의 소망을 담은 복음찬미 14곡을 처음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현지 언어습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감사한 일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품고 있는 10/40 창 지역의 언어는 대다수가 알타이어 계통이 많다는 점이다. 서구 선교사들이 처음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어순(語順)이 달라 언어 배우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마음 놓고 전통적인 선교인 교회개척이나 제자훈련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한국은 한류열풍으로 인해 좋은 호감을 받고 있고 언어마저 한국인들이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귀한 사명을 맡겨 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로 팀워크(teamwork)는 약한 편이었다. 선교지에서 “토종(土種) 한 명이 이방인(異邦人) 백 명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현지인 지도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예기다. 그렇지만 펜윅은 자문화우월주의(ethnocentrism) 사상을 버리는데 무려 13년의 세월이 걸렸다. 본인의 자서전에 의하면 본국에 있는 서구선교사들이 속히 와서 자신을 도와주어야 사역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지녔다. 이 생각을 깨는데 1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와서 거의 40줄이 다 되고 나서야 현지인과의 협력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가 신명균을 발굴하여 공주성경학원의 원장으로 보냈을 당시만 해도 불안한 생각을 가졌지만 이는 탁월한 결정이었다. 신명균은 얼마 있지 않아 그곳에서 12명의 제자를 세웠고 그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바로 손필환과 장석천이었다. 이들로 통해 공주지역에서의 교회개척이 상상 이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펜윅은 목격하였다. 그래서 펜윅은 고백하기를 “동양인에게는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의 방법이 어울린다. 이것은 잘 익은 과일에서 아름다운 꽃을 따버리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고 술회했다.
한국 선교사는 기후 및 음식 적응, 언어습득에 있어서는 탁월하지만 타인과 함께 팀워크를 하는데 무척 약하다. 한국 사회가 ‘1등 신드롬’에 빠져있다 보니 남에게 지적을 받거나 함께 어울리는 데는 많은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요즈음 성공하는 사람은 IQ(지능지수)나 EQ(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NQ(Network Quotient, 공존지수)가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공존지수가 높은 사람은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고 함께 공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여러 기관들이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연구자는 펜윅이 좀 더 일찍이 공존지수가 높아 팀워크를 이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 초창기 시기의 선교평가
한국교회에 고민이 있다면 네팔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창의적접근지역에 어떤 선교개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늘 복음전파와 사회봉사에 대한 우선순위로 고민하고 있는데 초기 한국교회에 복음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한국 선교사들은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을 구분해 본다면 알렌형(Horace N. Allen)과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형으로 나뉠 수 있다. 알렌은 친수구파 세력이었던 민영익의 병을 치유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민씨의 호의를 받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그는 재중원의 책임자로 한국을 변화하기 위해서 의료선교와 같은 사회봉사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반면 언더우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친개혁파인 김옥균과 박영효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입국하면서 교육선교를 통한 복음전파에 주력하였다. 두 사람의 팽팽한 입장은 처음에는 알렌이 우세하였지만 점차 언더우드로 기울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늘날 선교지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처음 선교지에 들어간 선임 선교사들 간에 선교정책이 정착되기 까지는 서로 간에 많은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연구자는 초기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설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언더우드의 선교정신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금세기 최고의 선교신학자인 랄프 윈트(Ralph Winter) 박사도 오늘날 필요한 선교개념은 군사명령(military mandate)이라고 강조했다. 즉 복음전도명령(evangelistic mandate)과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나치 침공으로 고통당하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해방시켜야 하지만 종국에는 악의 뿌리인 히틀러를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군사명령의 선교개념을 소개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게 자유를 되찾아 그들의 문화를 회복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히틀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없다. 그렇다. 문화명령을 수행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도명령을 수행해야 참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군사명령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초기 한국침례교회의 펜윅은 어떠했을까? 그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심취하여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등을 돌렸다. 선교사로의 소명이나 언어습득은 탁월했지만 세상의 요구를 외면했다. 그는 전형적으로 복음명령에만 주력했다. 펜윅은 알렌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알렌과 펜윅 모두는 너무 극단적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당시 한국정황과 흡사한 창의적접근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할 때 반드시 고려해 보아야 할 내용이다. 펜윅이 선교사로서의 기본적 자질을 갖추었지만 군사명령과 같은 통전적(wholistic) 선교개념을 가지고 접근했더라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II. 도약기 시기의 선교 (1906-1935)
도약기 시기는 펜윅이 대한기독교회를 창설한 1906년부터 그가 별세하기까지의 기간으로 펜윅 선교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그가 처음 15년 동안은 정착하느라 젊은 시절을 다 소비하였지만 나이 40줄이 되고 나서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30년간 지속되었다. 개인적으로, 교단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펜윅이 선교 황금기를 맞이한 시기는 한국사회가 일제강점기하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시절이라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다.
펜윅에게 굳이 별명을 붙인다면 ‘교회개척의 대가(大家)’ ‘교회개척의 달인(達人)’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혼자의 몸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45년 동안 사역하면서 250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약 200명의 지도자를 길러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도 이런 선교사를 만나기가 어렵다. 펜윅으로 하여금 다이너믹하게 사람을 길러내고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무엇인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1. 도약기 시기의 선교특징
“선교사는 선생이 되지 말고 멘토가 되어라”(missionary is not a teacher, but a mentor)는 말이 있다. 선교사가 그냥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으로는 현지인을 길러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치 멘토처럼 삶에서 흘러나오는 영성을 통해서 현지인을 올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28:20의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지키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현지인이 오랫동안 자신의 문화권에서 살다가 선교사가 소개한 성경적인 삶으로 산다는 것은 곧 문화변혁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자신의 문화, 세상적인 문화를 포기하라는 예기인데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힘든 것이 성경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전쟁이다. 현지인이 성경적 세계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 세계관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문화권에서 길들려진 세속적 세계관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반듯이 제자훈련이 필요하다. 선교사가 건강한 현지인 일꾼을 길러 내기위해서는 성경공부가 아닌 제자훈련으로 가능한데 펜윅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펜윅은 어떻게 사람을 길러냈는지 궁금하다. 그는 나이아가라사경회를 통해 성경을 배운 이후 1909년부터 사경공부를 실시하였다. 세대주의적 종말론 신앙으로 가득한 사경공부 교재이지만 훈련의 핵심은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펜윅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본으로 보여 준 것이다. 그는 서양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사는 것처럼 검소하게 살았고, 물질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청빈한 삶을 보여 주었다. 풀러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찰스 크래프트(Charles Kraft) 박사는 전달자의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메시지에 전달자의 인격(人格)이 묻어져 있을 때 가장 파워가 넘친다고 하였다. 연구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한 예로 펜윅이 1897년 소래사경회에서 300명의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은 것도 메시지에 그의 풍성한 인격이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펜윅은 제자를 양육할 때 그저 성경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펜윅의 제자훈련 방법이었고, 그의 힘이며 능력이었다.
두 번째로 도약기 시기에는 교회개척이 뛰어났다. 펜윅이 탁월하게 교회개척을 할 수 있었던 신학적 배경은 전천년주의 종말론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 온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에 빠져 있었는데 펜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45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하면서 세운 교회를 보면 한국전역에 100개, 만주지역에 100개, 시베리야에 47개, 몽골에 수개 처를 세웠다. 펜윅이 이처럼 많은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멘토였던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영향 때문이었다. 중국내지선교회(CIM)의 창시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순회선교, 오지선교, 신앙선교로 중국선교를 이루어갔다.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종말론 신앙은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였고 힘든 오지라도 기쁨으로 가서 선교하였다. 이것이 바로 펜윅에게도 나타났다.
하지만 당시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한 언더우드는 펜윅과 교회개척 방법이 달랐다. 그 또한 펜윅처럼 26세의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헌신하였기에 당시 중국에서 좋은 평을 받았던 네비우스(John Nevius) 선교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경력이 풍부하고 전략이 검증된 선임 선교사의 도움이 필요한 터라 마치 안식년 계획 중이던 네비우스를 한국에 초청해 세미나를 갖게 하여 그가 소개한 네비우스 정책을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정책으로 받아들였다. 핵심은 헨리 벤(Henry Venn)의 3자원리(자립, 자치, 자전)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사의 도움을 점차 줄여 가며 경제적으로 자립하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펜윅은 달랐다. 한 명의 일꾼이 여러 지역을 순방하며 말씀을 전하는 순회선교가 핵심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헨리 벤의 자립정신이 초기 한국침례교회에서는 극히 미약했다. 120년의 세월이 지난이후 한국침례교회는 아직도 미자립교회가 많다는 것은 그 뿌리가 펜윅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펜윅이 복음전도자를 키우는 일은 우수하였는데 스스로 자립하는 교회개척자를 세우는 데는 약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현지인 위임이 부족하였다. 선교사의 사역 형태는 ‘부모->동역자->후원자’ 단계로 성장해야 정상적이다. 이 때 선교사의 마지막 모습은 스스로 후원자가 되어 현지인에 이양하는 것이다. 선교사가 목회자와 차이가 있는 점은 바로 위임(leaving)에 있다. 위임이 되지 않은 사역은 선교사가 제왕으로 군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FMB의 경우에는 카자흐스탄이나 중국에서 선임 선교사들이 하나 둘씩 현지인에게 사역을 위임하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인데 펜윅은 달랐다. 그가 45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200명의 일꾼을 세운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자기 제자들에게 과감하게 이양하지는 못했다.
펜윅의 사역은 당시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는 달랐다. 언더우드는 네비우스의 영향을 받아 현지인 교회 스스로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는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자치(self-governing)하거나 자전(self-propagating)하는 일에도 중점을 두었다. 그렇다보니 처음에 열악했던 현지인 교회가 차츰 독립적으로 사역할 수 있게 되었고 급기야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현지인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펜윅의 제자들은 순회 전도자로 활동하다보니 복음전하는 일에는 뛰어났으나 한 교회가 한 명의 사역자를 책임지도록 하지는 못했다. 펜윅은 초기에 원산농장을 구입해 자기 스스로 선교비를 충당하며 자립선교를 감당해 갔는데 그의 제자들 역시 펜윅처럼 자립하는 교회를 만들도록 훈련시켜야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펜윅은 선교사로서 부모의 역할은 잘 하였지만 종국에는 현지인에게 이양하여 후원자(assistant)로 남아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2. 도약기 시기의 선교평가
펜윅이 신앙선교, 오지선교, 순회선교, 문서선교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이아가라사경회 거장들의 영향이 지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선교사들이 흉내 낼 수도 없는 일들을 45년의 세월동안 인내하며 일구어 낸 열매들은 고마운 일이다. 요즘처럼 나약해 지거나 의존성이 강한 선교사들에게는 가슴 깊이 간직할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학교나 병원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유산을 남겨주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선교 정신만은 꼭 이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펜윅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20세기 초 한국사회가 근대화로 접어들 때 디아코니아(사회봉사, Diakonia) 선교가 너무 빈약하였다. 주변의 이웃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삶을 나누는” 디아코니아가 펜윅에게는 부족하였다. 펜윅이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읽고 한국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섬기는 삶이 약했다는 예기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디아코니아는 포괄적이고 통전적이 되어야 한다. 통전적이라는 말은 구원과 섬김, 복음전파와 사회봉사, 내적 신앙과 외적 사역을 구분하지 않고 포괄하는 것을 말한다. 펜윅에게는 이런 디아코니아적 선교가 부족했다.
III. 암흑기 시기의 선교 (1936-1987)
한국침례교회는 펜윅이 별세한 1936년부터 FMB가 1988년 창립되기 전까지 50년 동안 선교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특별히 타 교단에서는 한국 전쟁이후 선교에 주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만 한국침례교회는 오랫동안 선교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침례교회가 겪었던 아픔의 시기를 살펴보면서 다시는 이런 고통이 재현되지 않았으면 한다. FMB가 선교암흑기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내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외적인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1. 선교 쇠퇴 이유
한국침례교 선교침체의 첫 번째 요소는 펜윅의 별세에 따른 인재부재라 할 수 있다. 펜윅은 1935년 12월 6일, 향년 72세의 나이에 원산자택에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내 무덤은 봉분(峰墳)하지 말고 평장으로 하라”고 요구할 만큼 자신이 죽고 난 이후 우상화(偶像化)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을 평장으로 요구한 겸손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전 재산은 교단의 발전을 위해 기증할 만큼 물질 관리에 있어서도 사욕을 버린 청빈한 선교사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펜윅이 많은 제자를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준을 뛰어넘는 탁월한 지도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타 교단에서는 길선주, 이성봉, 주기철 같은 걸출한 일꾼들이 탄생했지만 한국침례교단은 그렇지 못했다. 펜윅은 복음전도자는 많이 배출했으나 한국교계를 이끌고 갈 만한 능력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지 못했고 이는 펜윅의 선교비전을 대신 이어갈 인물부재로 선교의 길은 요원하였다.
둘째로 교단폐쇄령 때문이었다. 1942년 교계 지도자 32명은 일본제국이 강요했던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원산구치소에 수감되어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급기야는 1944년 5월 10일에 교단폐쇄령을 당하여 선교의 문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교단의 일꾼들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기뻐했는데 그 이유는 환란전 휴거설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펜윅은 “대 환란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사탄이 옥에서 놓이게 될 것이며 곡과 마곡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고 가르쳤고 그의 제자들은 환란 전에 휴거함으로 이 세상의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펜윅의 신앙으로 모든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다. 교단폐쇄령으로 펜윅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들은 소각되었고 선교의 열정은 외압으로 식을 수밖에 없었다.
셋째로 8ㆍ15 해방은 우리 조국을 위해서는 축복이었지만 한국침례교회에는 큰 시련의 시작이었다. 펜윅이 개척한 교회가운데 70% 이상이 북한, 만주, 시베리아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펜윅이 동북아 선교의 교두보로 한국을 생각하여 북방 선교에 올인 하다 보니 해방이후 남한에 남아있는 교회는 극소수에 불과하여 자생하기조차도 힘들었다. 그래서 남한에 있는 40개 교회를 가지고는 선교할 여력조차도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1959년부터 1968년까지의 교단분열이었다. 펜윅의 지도자들은 교단을 회생키 위해 펜윅의 정신과 유사한 외부의 협조를 받아야 했는데 마침내 1949년에 이르러 미국남침례교(SBC)와 제휴하여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총회 장소 문제로 인하여 안대벽을 중심으로 한 포항파와 장일수 목사를 중심으로 선교부와 손을 잡고 개혁을 추구하던 대전파 사이에 갈등이 생겨 한국침례교회는 1959년부터 10년 동안 분열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선교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2. 암흑기 시기의 선교평가
한국침례교회가 약 50년간 선교 암흑기를 맞게 된 것은 내적 요인으로는 펜윅의 별세와 교단분열 때문이었고 외적 요인으로는 교단폐쇄령과 8ㆍ15 해방 때문이었다. 내ㆍ외적 요소로 인하여 침례교단은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전략적으로 조직적으로 선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타 교단에서는 산업발전과 더불어 앞 다퉈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선교에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외적인 요소보다는 내적으로 서로 갈등하고 분열하는 모습은 선교의 힘을 상실해 버렸고 시대에 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IV. 재건기 시기의 선교 (1988-2005)
1. 선교 재건 이유
한국침례교회는 펜윅 시절 잠깐 선교의 꽃을 피우다가 긴 세월동안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근대화, 산업화 바람이 불던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선교가 가동되기 시작되어 오랫동안 선교의 동면상태에서 깨어나 선교 재건을 이룰 수 있었던 1차적인 이유는 해외선교회의 창립이라 할 수 있겠다. 1988년은 한국침례교회에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이다. 왜냐하면 예전에 간헐적으로 선교 활동하던 일들을 FMB라는 기관이 창립되어 조직적으로 선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FMB의 선교 목적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세우는 일에 우선을 두고 있기에 복음전파, 제자훈련, 교회개척이라는 전통적인 선교개념이 매우 강하다. 그렇다보니 사회봉사와 같은 디아코니아 선교가 약한 것이 현실이다. 선교 목표에 있어서는 필요지역과 긴급지역에 사람을 우선적으로 파송하고, 사역의 최종 목표는 위임(leaving)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세계선교훈련원(WMTC)의 개원이라 할 수 있다. WMTC는 1994년 연건평 1,030평 대지위에 선교동원, 선교훈련, 선교전략연구, 아시아 침례교 지도자 훈련이라는 4가지 목표로 개원되었다. FMB에서 파송 받는 선교사는 누구든지 WMTC가 제공하는 장ㆍ단기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여 수료해야만 한다. 선교지에서 2년간 사역하는 자는 7주간의 단기훈련을, 4년 이상 사역하는 자는 14주간의 장기훈련을 받아야 한다. 2008년에는 특별히 한인교포의 급증에 따라 디아스포라 선교사훈련의 필요함을 느껴 7주간의 디아스포라 선교사 훈련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누구든지 북미주를 제외한 지역에서 한인목회를 하고자 하는 자는 디아스포라 훈련을 받고 파송 받으면 된다. 훈련 프로그램은 인격과 지식과 사역기술을 총체적으로 훈련시키고 있는데 순서는 ‘Being(인격)->Knowing(선교이해)->Doing(사역기술)’의 순으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아무리 선교적인 지식과 사역기술이 뛰어난다 할지라도 인격과 삶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면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WMTC는 장ㆍ단기 그리고 디아스포라 선교사 훈련 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커리큘럼이 바로 인격(人格)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FMB 선교사의 자질을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셋째는 Baptist Vision이다. 선교사 훈련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선교동원이 잘 일어나야 한다. 우리 교단의 경우 선교동원은 1994년 Baptist Vision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선교동원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선교한국이다. 선교한국은 매년 짝수 년도마다 실시하며 대상자도 청년 대학생이기에 Baptist Vision은 이들이 실시하는 짝수 년도를 피하여 홀수 년도로 바꾸어 격년제로 실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50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였지만 점차 그 숫자가 줄여 들어 요즘에는 그 명칭을 Baptist Transformation(BT)으로 바꿔 실시하고 있다. 이유는 1990년대에 너무 많은 선교동원이 일어나서 기대 이상의 동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7년부터 FMB에서는 한국침례교회 청년ㆍ대학생을 대상으로 영적각성운동 성격인 ‘Baptist Transformation 2007’을 실시하였고 이 때 선교에 헌신한 자들을 동원시키고 있다. 그 외에 10주 과정의 미션퍼스펙티브스(Mission Perspectives, MP)라는 선교학교를 지역교회나 지방회를 대상으로 열고 있다. MP 과정은 성경적 관점, 역사적 관점, 전략적 관점, 문화적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강좌를 개설하여 선교를 좀 더 깊이 연구하고 선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2. 재건기 시기의 선교평가
사실 FMB는 타 교단선교부나 타 선교단체보다 10년 정도 늦게 시작했지만 이들 선교단체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속히 보완함으로 실수를 줄여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FMB가 시작은 늦었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개발하여 시행함으로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FMB가 풀어야 할 과제는 교단 이름으로 파송 받지 못한 소위 독립꾼 선교사들을 재교육하는 문제였다. 본인들은 침례교 선교사라고 하지만 훈련받은 선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필리핀에는 독립꾼 선교사들이 많아 두 차례에 걸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선교사연장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교단에서 선교훈련기관이 없어서 독립꾼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이제는 달라졌기에 모든 교회가 단독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지 말고 반듯이 WMTC에서 선교사 훈련을 시킨 뒤 파송하길 바란다.
두 번째는 한국침례교회가 지향해야 할 선교구조가 통합성(synthesis)임을 재확인 하였으면 한다. 오늘날 선교구조는 지역교회가 중심이 되는 모달리티(modality)도 아니고, 선교단체가 핵심이 되는 소달리티(sodality)도 아닌 모탈리티와 소달리티를 합친 통합성의 선교구조가 FMB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1988년 FMB가 형성되기 전에는 지역교회 중심의 모달리티 선교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세월이 달라졌다. 지역교회에서는 기도하며 후원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선교사 훈련은 WMTC에 맡겨 통합성의 선교구조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지역교회는 선교사 훈련이나 안식년으로 돌아오는 선교사들에 대한 멤버케어 같은 것이 전문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2,800개의 한국침례교회가 서로 신뢰하고 연합해야 한다. 본부와 훈련원에 대한 신뢰 그리고 지역교회와 훈련원의 긴밀한 협조는 앞으로 한국침례교회가 추구해야할 선교 구조이다.
V. 부흥기 시기의 선교 (2006~)
2006년은 한국침례교회 선교부흥의 원년의 해이다. 왜냐하면 100년 전인 1906년에 한태영이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북간도에 파송된 지 100주년이 되는 기념의 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FMB에서는 선교사파송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 4월에 양수리 수양관에서 제1차 침례교 선교지도자 포럼을 갖기도 했다. 이 때 전 세계에 흩어진 침례교 선교사들 가운데 6년 이상의 장기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각 권역별로 선교사역을 소개하고 평가받은 귀한 기회를 갖기도 했다. 마칠 즈음에는 ‘VISION 2010’을 다시 점검하여 100개의 관문도시에 1천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8년 9월에는 ‘VISION 2020’을 홍천 비발디에서 발표하여 새롭게 도약할 것을 결의하였다. FMB가 2006년 기점으로 선교부흥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은 감사한데 앞으로 지속적으로 선교의 열매를 거둬들이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제안하려고 한다.
1. 선교사 훈련의 다양화
한국침례교회는 지금까지 장ㆍ단기 선교사 훈련만을 실시해 왔다. 하지만 요즘 해외이주 한인들이 급증하면서 디아스포라 선교사 훈련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금년 2008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선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그 이유는 2008년 현재 4,900만 인구 가운데 무려 700만 이상이 해외에 살고 있어서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디아스포라 숫자상으로는 중국이 4,500만으로 가장 많지만 인구 13억 가운데는 겨우 3.5%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은 이스라엘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인구 대비 비율로는 디아스포라 비율이 높은 국가이다. 2020년이 되면 그 숫자는 자그마치 1,500만에 이를 예정이다. 조기유학, 중소기업 해외투자 확대, 고령자 해외거주 선호도가 점차 높아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들만 FMB에서 정식으로 허입 했지만 2008년부터는 달라졌다. 누구든지 WMTC의 훈련을 받기만 하면 디아스포라 선교사로 파송 받을 수 있다. 다만 현지인 선교사와 차이점이 있다면 자기 스스로가 목양(caring), 자녀교육, 선교동원의 은사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한인교포들은 타국에서 살면서 많은 눈물과 상처가 있어서 목사와 사모가 동시에 목양하는 달란트가 있어야 한다. 특히 사모는 남편 따라 무임승차하는 사모가 되지 말고 진심으로 성도들을 돌보는 사모상을 정립되어야 한다. FMB가 장ㆍ단기 외에 디아스포라 선교사 훈련 같은 다양한 선교훈련을 제공함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바라기는 앞으로 2년 혹은 3년 내에 다민족 선교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2007년을 기점으로 외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다민족의 숫자가 100만을 넘어서서 전체 인구에 2%를 차지하고 있다. 2020년이 되면 400만 명이 되어 전체인구의 5%를 차지할 예정이다. 한국은 1987년 외국인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유입하여 3D 업종에 이들의 도움을 받아오고 있다. 더욱이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으로 노동력이 감소되어 국제결혼이 농촌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2020년이 되면 한국의 신생아 3명 중 1명은 혼혈아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은 다문화, 다가정, 다민족으로 탈바꿈하고 있어서 이에 대비하는 다민족 선교 훈련 프로그램이 한국침례교회에 준비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2. 선교사 케어 극대화
선교사 훈련은 파송 받기 전에 실시하는 ‘pre-field training’과 선교지에서 훈련을 직접 감당하는 ‘in-field training’과 그리고 모국에 와서 재교육을 하는 ‘extension training’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까지 WMTC에서는 파송 전 훈련에만 신경 썼지 안식년으로 본국에 돌아온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훈련을 하지는 못했다. 현재 FMB의 경우 매달 안식년으로 돌아오는 숫자가 무려 30명을 넘어서고 있는데 이들을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케어해 주는 교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몸과 마음이 지친 이들에게 ‘AS 훈련’ 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WMTC에서는 2009년부터 선교사연장훈련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것 또한 타 선교단체나 타 교단에서는 염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안식년 선교사는 많아질 것이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안식관이라든가 선교사연장훈련 등은 필히 준비해야 할 터인데 FMB의 경우 이에 대한 대비를 점차 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역교회도 선교사케어에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한다. 사실 지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는 4개의 사이클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데 ‘선교교육->선교후원->선교참여->선교사케어’ 이다. 여기서 한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경우 마지막으로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바로 선교사 멤버케어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선교사 파송에만 신경 썼지 멤버케어에는 눈을 돌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본다. 지역교회와 WMTC와 FMB 본부가 함께 선교사 멤버케어를 할 수 있다면 21세기 한국침례교회의 선교는 밝다고 본다.
3. 선교전략의 전문화
한국침례교회가 21세기 선교를 주도하기 위해 선교전략의 전문화를 꽤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슬람 선교전략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FMB의 경우 선교사의 1/3이 무슬림권에서 사역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숫자는 계속 증가할 추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FMB는 NAME(North Africa & Middle East) 정책에 따라 우선적으로 NAME 주변의 무슬림권에 선교사를 대거 파송하였다. 중앙아시아라든가 북인도의 경우가 그렇다. 이 지역에서의 선교 열매는 이제 나타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근본주의 이슬람권인 NAME 지역에도 선교사 파송이 늘어날 예정이다. 그렇다면 FMB 자체 내에서 요즘 논의 되고 있는 내부자운동(Insider Movement)을 수용할 것인지 여부가 확정되어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수용을 주장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반대하고 있어서 선교사들 사이에 혼선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자체 내에서 이런 논의가 되어 있어서 분명한 정책을 선교사들에게 알려주고 또한 이슬람선교를 추천할 선교단체도 선별해서 알려 줘야 한다. 교단선교부는 전문선교단체와는 달리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선교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특별한 선교전략에 대해서는 타 선교단체와 이중 멤버십(dual membership)을 허용하여 함께 상생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북한선교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현재 FMB의 경우 북한선교를 하는 선교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펜윅이 동북아 선교에 힘을 쏟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너무 초라하기 그지없다. 김정일의 나이가 앞으로 4년 후면 70세가 되기 때문에 북한 전문가가 예측하기로는 북한은 5년 내지 10년 내에 북한사회가 붕괴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남침례교회의 국제선교부(IMB)의 경우는 다양한 채널로 북한선교를 하고 있지만 우리 FMB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IMB와 손을 잡고 NK(North Korea)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면 그들이 지니고 있는 방대한 자료들과 경험들이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 실정으로 이에 대한 대비를 못하고 있어서 조만간 FMB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신도 선교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1989년은 세계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 선교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89년 이전에는 냉전체제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극한 대립이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1989년 구소련이 붕괴함으로 중앙아시아의 15개 국가들이 독립하였고, 동독이 무너짐으로 동서독이 통일되어 사회주의는 실패를 고하였다. 더욱이 1990년대 초에 중국은 완전 개방을 선언하여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989년 이전에는 냉전 시대라서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창의적접근지역에 전문인 선교사로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요즘은 탈냉전시대로 바꿨고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탈바꿈함으로 적극적인 선교전략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비즈니스선교(Business As Mission, BAM)이다. FMB의 선교정책 자체가 전통적 선교개념이 강한데 로잔선교 개념으로 바꿔야만 한다. 즉, ‘선교=복음전파+사회봉사’ 라는 통전적 개념으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할 것이다. 능력 있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과감히 사회주의권에 비즈니스 선교사로 파송되어야 한다. 특별히 비즈니스 선교는 10/40 창 지역의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와 같은 열악한 지역에 자립(self-supporting) 선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1857년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이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문명의 두 선구자인 기독교와 상업은 절대 분리할 수 없다”고 강의한 내용을 되새김질 해 봐야 한다. 그는 이미 1세기 반 전에 복음과 비즈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깨달았는데 우리는 너무 비즈니즈에 움찔하고 있는 것 같다. FMB의 경우 비즈니스 선교사는 2%도 채 되지 않는 실정이어서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을 읽고 대처할 수 있어야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나오는 말
“침례교인은 선교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펜윅으로부터 시작한 한국침례교회는 120년 동안 선교하는 교단으로 성장했고, 금년은 FMB가 창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먼저 한국침례교회는 베드로와 같은 1세대 선교사들이 바울 같은 1ㆍ5세나 2세대 선교사들을 배출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즈음 선교 헌신자들이 달라지기 시작해 예전에는 베드로와 같은 1세대 선교사들이 훈련에 참석하는 자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선교사 자녀들인 MK(Missionary Kid)들이 훈련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고무적인 현상이며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한국침례교 1세대 선교사들은 스스로가 먼저 베드로가 되어 바울을 세우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베드로는 바울이 될 수 없지만 자신의 사역을 통해 주변에 있는 바울 같은 1ㆍ5세나 2세들이 선교에 헌신할 수 있도록 동원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 처음에는 순종치 않다가 결국 가서 말씀을 전하여 그의 모든 가족들을 구원시켰다. 베드로는 언어나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바울에게 뒤쳐진 자였다. 그런데 당시 자신의 고향 땅에서 자숙하고 있던 바울은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에게 복음 전하는 것에 큰 도전을 받았다. 이후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바나바의 사역 요청이 있을 때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1세대 선교사들은 스스로 베드로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은 바울처럼 현지 언어가 자유롭지 않아 갈라디아나 고린도 같은 이방 지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의 삶을 보고 주변에 있던 1ㆍ5세나 2세들이 바울처럼 선교사역에 헌신토록 해야 할 것이다. 금년에 FMB는 역사상 처음으로 MK 출신인 L 선교사가 탄생하여 우즈베키스탄으로 파송되었다. 앞으로 이런 MK들이 더욱 많이 나올 것이다. 1세대 선교사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바울과 같이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도록 동원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두 번째로 한국침례교회는 현지인 지도자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FMB는 그동안 각 권역별로 현지인 지도자들이 많이 일어났다. 현재는 FMB 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를 통해 이들이 훈련받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열악한 실정이다. 커리큘럼이라든가 강사진이라든가 재정이 너무 열악하여 질 높은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FMB와 침례신학대학교 간에 우선 협정이 필요하겠다. 침례신학대학교는 처음 학교가 세워졌을 때 미국남침례교회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것을 기억하여 우리 침례교 선교사들이 길러 낸 현지인 지도자들에게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돌보지 못한다면 이들이 다른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 되도다”고 하신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거저 줄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침례교회는 더 밝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각 분야별로 선교 전문가들을 배출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필드형 선교사들만 양성하지 말고 사람을 세우는 일꾼들을 길러내야 한다. 예를 들어 FMB에서 선교동원가, 선교전략가, 선교훈련가, 디아스포라전문가, 선교상담가, MK전문가들이 하나 둘씩 배출되어 국제적인 인물로 사역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한국침례교회 선교는 경쟁력이 있을 것이며 21세기 선교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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