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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학자료 > 논문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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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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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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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ad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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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침례교 선교역사에 관한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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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열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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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2006년은 한국침례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지 100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펜윅 선교사가 한국침례교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를 1906년에 창설하고 한태영 선교사를 북간도로 파송하면서 해외선교의 물꼬를 틀고 난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침례교회의 선교 발자취를 살펴본다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한국침례교회의 선교 100년 역사는 1987년 해외선교회(FMB)가 창립 된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필자는 해외선교회가 창립되기 전까지 한국침례교회의 선교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평가함으로써 앞으로 한국침례교회가 21세기 세계선교의 주역이 되기 위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찾고자 한다.
I. 한국침례교 선교약사: 해외선교회 창립 전까지
1. 초창기 시기의 선교 (1889년-1905년)
한국침례교회의 선교는 말콤 펜윅(Malcolm Fenwick,1863-1935) 선교사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1889년 12월 8일 인천에 도착하면서 한국침례교회의 선교가 열리게 되는데 초창기에는 가식적인 선교열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미래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데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 펜윅은 자립선교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에 개신교가 처음 소개 될 즈음에 대다수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신들을 파송한 본부로부터 물질적인 후원을 받으며 학교를 세우거나 병원을 짓고 있을 때 펜윅은 자립 선교사로서 기초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펜윅이 자립선교(自立宣敎)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대단한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펜윅은 한국에 온지 2년이 채 안되던 1891년에 원산농장을 구입하여 과일과 식물과 채소와 원예를 가꾸었고 1926년 이 농장을 매매하기 까지 약 35년간 펜윅은 외부의 기독교 단체나 지역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自力)으로 선교하는 산업 선교사였다.
펜윅은 1898년에「한국인의 보고」(Korean Repository)란 잡지에서 “한국의 농사법”이란 글을 기재하여 농업에 대한 그의 뛰어난 전문 지식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기사에서 펜윅은 메밀은 한국의 토양에서 비료를 사용치 않아도 잘 자라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 가난한 사람에게 인기가 있고, 스웨덴 무우는 밀, 귀리, 또는 보리를 심은 이후에 우기에 파송하면 잘 자라는 곡물이라고 보고하였다. 그가 농업에 박식하였던 이유는 캐나다에 있을 시절 온타리오의 시범농장에서 일하였던 경험이 원산농장을 경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펜윅의 탁월한 농법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자립 선교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원산시장(元山市長)이었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 선생은 회고하기를 “나는 이 지역의 침례교 선교사인 말콤 펜윅 목사와 함께 일하고 있으며 원산농장에서 거둬들인 과일이 잘 자라서 수확 중에 있다”고 말하였다. 원산농장에서 수확한 과일은 학교 커리큘럼에 따라서 원산의 공립학교에 공급되기도 하였고, 또한 원산과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수출되기도 하였는데 이 때 2말에 15루불(러시아의 화폐단위) 정도로 팔려나가던 원산과일은 금 한 배럴에 25달러의 값과 맞먹는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다고 펜윅은 전하고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원산농장은 웰빙(wellbeing)농장으로 원산시장과 지역사회가 인정하고 나아가 외국에서까지도 선호하는 인기 있는 농장이었다. 그래서 펜윅의 제자들은 펜윅이 비록 농과대학을 졸업하진 않았지만 농업과 원예 등에 있어서 탁월한 실력을 소유하고 있기에 펜윅을 “농학박사”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펜윅의 “자립(自立)이란 용어와 자립 선교의 원리를 처음 소개한 헨리 벤(Henry Venn)간의 약간의 차이가 있다. 헨리 벤이 말하는 자립은 지역교회가 외부 선교사나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지 않고 현지인 교회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전임사역자의 임금을 지불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반면에 펜윅의 자립이라 하는 것은 지역교회의 자립보다는 선교사 스스로의 자립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펜윅이 이 시기에 펼친 두 번째 작업은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온지 2년이 채 안 된 1891년에 펜윅은「요한복음전」을 처음으로 발행하였다. 이「요한복음전」에서 펜윅은 양반층과 서민층을 동시에 전도할 목적으로 한문과 한글을 병용한 성경을 번역하였음을 볼 때 그는 상류층뿐만 아니라 성경을 한국 서민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하는데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옛 한국의 관습에 따르면 상류층은 오직 한문만 읽고 썼으며 오늘날의 한글은 언문이라고 해서 무시하며 잘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펜윅은 마틴 루터처럼 성경을 서민층의 언어로 번역한 위대한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전」에서 펜윅은 또한 그의 상황화 선교 전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예로 그는 신(神)을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한국인들은 하나님이란 말을 쓸 때 ‘하나’를 ‘한 사람’으로 ‘님’을 ‘구주 혹은 주님’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한국 샤머니즘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여러 신들의 계급 조직에서 유일신을 의미하는 수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펜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서적 개념을 한국 문화에 상황화 시키는 작업에서 하나님이란 용어를 신을 의미하는 말로 채택함으로 그의 상황화 선교 전략의 한 면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펜윅은 정상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착수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펜윅이 한국으로 파송되기 이전에 그가 정규적으로 참여하였던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 사경회를 인도했던 브룩스, 고든, 어드만, 피어슨은 모두 종교 잡지나 정기 간행물에 수많은 글들을 기고하였던 유명한 저자들이었다. 펜윅은 이들의 문서 활동이 19세기 후반 미국의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을 직접 보았고 그 역시 한국 땅에 온지 얼마 안 되어 문서 선교에 박차를 가해 1891년「요한복음전」을 번역하였다. 그 이후 1893년에는「요한복음전」을 수정하여 간행한「약한의 긔록한 대로 복음」을 발행하였고 1899년에는「요한복음」과 「빌립보서」의 합본을 발간하였으며 그 해 펜윅은 또한「복음찬미」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결실은 그가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통해 깨달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초창기에 펜윅은 불신자들을 직접 찾아가 전도하는 비중을 낮추었다. 오히려 산업선교와 문서선교와 같은 간접선교로 선교사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데 주력하여 훗날 이 터전위에 선교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데 힘을 썼다.
2. 도약기 시기의 선교 (1906년-1935년)
펜윅이 1906년 첫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초기 한국침례교회가 선교황금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천년주의 종말론은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성행했던 것으로 주님이 재림하시기전 하루라도 빨리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 전천년주의 영향은 펜윅을 토론토에서 성공하던 비즈니스를 멈추고 선교사로 헌신토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사상은 수많은 한국 선교사들을 만주와 시베리아와 같은 동북아시아에 지체 없이 파송하는 근거가 되었다.
펜윅의 종말론의 특징은 전천년주의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취급하는 예언을 강조하고 있다. 펜윅은「편공부 연설」에서 예언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펜윅은 예언에 관한 설교를 처음부터 다루면서, “여기에 세상의 창조로부터 마지막 예언이 있소”라며 언급하고 있다. 펜윅은 또한「사경공부」에서 전천년주의를 다루는 예언을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대 환란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사탄이 옥에서 놓이게 될 것이며 곡과 마곡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전천년주의 재림은 성경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마24:24-30; 계12:7-12; 19:11-16; 20:6-13.”
펜윅의 종말론은 나이아가라 사경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없는 사실인데, 특히 1888년 사경회 때에는 전천년주의 예언을 다루는 메시지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무어헤드는 “예언서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성과 희생적인 사역”이란 주제를, 어드만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그리스도의 인성과 전천년주의 재림”에 관한 메시지를 강연하였다.
펜윅이 예언에 관심을 가졌던 주된 이유는 문자 영감설을 반박하는 고등 비평가들을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펜윅은 주장하기를 고등 비평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워드롭(Wardrope)이란 한 나이아가라 참석자는 문자적 해석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당신이 “문자적”[해석]으로 인하여 충분한 것 이상으로 성경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면 내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가끔씩 천재의 책이 영감을 받았다는 의미로 영감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에게 주어짐으로 성령께서 이러한 생각들이 표현되는 단어에게 영감을 베푼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성경원본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이런 영감설은 역사적으로 교리적으로 시적으로 예언적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에 퍼지게 된다.”
펜윅의 전천년주의 종말론의 가장 큰 성과는 해외선교를 활성화시켰다. 그의 종말론 사상의 열매라 할 수 있는 오지선교 정책은 제자들로 하여금 만주, 시베리아, 그리고 몽골과 같은 해외 선교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강요하였다. 예를 들어 대한기독교회가 1906년 타문화권 선교지에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1명, 1913년에는 7명, 1920년에는 20명, 1925년에는 34명, 그리고 1934년에는 36명으로 늘어났다. 선교사의 숫자가 증가하였던 이유는 펜윅의 제자들이 선교지에서 영적인 삶을 살기로 원했고 크리스천 삶의 실제적인 책임을 수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두 번째로 도약기시기에 펜윅의 주요 업적으로는 오지선교를 들 수 있겠다. 펜윅은 오지선교의 용어를 한국 순회 선교회의 원리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제 선교지에서 다른 선교단체나 선교사들과 충돌을 겪지 않고 한국 전 지역에 복음을 직접 전할 수 있는 열린 문과 넓은 장소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 순회 선교회의 커다란 목적이다.” 펜윅이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눅14:23)라는 메시지에 의지해서 선교사들을 “열린 문과 넓은 장소”로 파송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오지지역은 어디를 말할까? 펜윅은 이에 장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마 선교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더욱 흥미로운 일은 한국의 “북쪽 끝”인 국경지역에서의 사역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이곳은 두만강 넘어 광활한 중국 대륙이 시작 되는 곳이며, 러시아가 그들의 땅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 밖의 대양으로 진출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열망으로 국경을 확장시켜 온 곳이기도 했다. 이곳의 사역은 주변 상황과 하나님께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들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펜윅은 한국이 오지지역인 만주와 시베리아와 몽골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교라 여겼기에 한국은 북방선교의 가장 적합한 토대가 되었다. 그의 선교 개념은 국내지역보다는 오히려 오지지역에 교회를 세우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의심할 것 없이 펜윅의 오지선교 전략은 고든의 학교가 세웠던 원리로부터 이루어졌다: “초교파적으로, 복음적으로, 소박하게 ‘오지선교’가 주는 유익함을 얻기 위해 집중하며 1889년 10월 2일에 개원했다.” 고든의 오지선교 전략은 분명히 아프리카나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언급되어져 있다: “지난 세월 학교에 다녔던 자들의 명단을 훑어보면 서로 생활 편지를 주고받는 자들로 고려되는 자가 약 100명 정도나 된다. 이중 25명은 외국으로 나갔는데. .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프리카, 인도, 중국, 한국, 일본, 인도서부와 같은 지구의 오지지역에서 믿음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더욱이 1895년 10월에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에서 오지선교에 관한 보고가 다음과 같이 있었다: “이미 우리에게서 나간 사람들로부터 오는 기분 좋은 소식은 끊임없는 격려가 되며 또한 이곳에서 이루어진 가르침의 실제적인 가치를 분명히 입증하는 것이다. 한국[엘라 씽 기념 선교회]에서의 새로운 선교는 이미 서울에서의 첫 개종자를 얻었고 점차 해 안가 지역으로 팽창되어져 가고 있으며 그 지역의 다른 곳에 새로운 선교센터를 개원하려고 계획 중에 있다.” 엘라 씽 기념 선교회가 1895년 한국에서 성공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 실례가 지적하고 있다. 복음을 콩고에 전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일한 리빙스톤의 사역으로 인하여 엘라씽 기념 선교회가 생겨났지만, 이것의 열매는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그런데 펜윅이 오지선교를 통한 선교열매는 주로 북동아시아에서 이루어졌다.
도약기 시기에는 초창기와는 달리 직접선교가 우세하였다.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과 오지선교는 선교사들로 하여금 직접 가서 전하는 선교를 하게 하였고, 초기한국침례교회는 중국, 만주, 시베리아 전 지역에 약 250명의 사역자를 파송하여 선교의 부흥을 맞게 되었다.
3. 암흑기 시기의 선교 (1936년-1986년)
펜윅이 죽고 난 이후 초기한국침례교회는 약 50년 세월동안 선교암흑기(1935년-1986년)에 접어들게 된다. 장로교와 감리교와는 달리 한국침례교회가 선교 침체를 맞게 된 이유는 펜윅이 별세(1935년)한 이후 지도자의 부재가 따랐고, 교단해체령(1944년)으로 선교의 목적마저 상실하게 되었으며, 또한 초기한국침례교회 개척의 2/3가 북쪽에 이루어졌는데 한국전쟁(1950년-52년) 이후 북한에 있던 대다수의 교회들은 사라지게 되었고, 해방이후 교단분열(1959년-68년)은 선교의 뿌리조차 뽑아버리는 계기가 되어 약 50년간 한국침례교회는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내홍으로 선교는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침례교회는 1987년 해외선교회가 창립되면서 선교의 재건을 이루게 되었다.
II. 말콤 펜윅의 한국선교의 동기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 목회자 사이에 성행했던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에 빠져 있던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 그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하루라도 빨리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 때문에 선교 훈련 받는 시간도 아까워 급히 선교 현장 속으로 달려간 캐나다 선교사이다. 펜윅은 45년 동안 한국 땅에 머물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였고 고등교육을 받은 다른 동료 선교사들처럼 교육선교나 의료선교와 같은 유형의 유산을 남겨 주지는 못했지만 신앙선교, 오지선교, 문서선교와 같은 정신적 유산을 물려줌으로 오늘날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선교 유산을 남겨 놓았다.
영혼을 사랑하는 강한 열정을 지닌 펜윅은 1935년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원교단이나 다른 선교사의 도움 없이 약 200개의 교회를 세웠고 250명의 사역자들을 배출하였다. 클리포드 클락(Clifford Clark)은 펜윅을 ‘한국 선교의 혁신자’로 불렀는데, 교육이 미비했던 펜윅이 어떻게 이런 선교 열매가 가능했을까? 펜윅이 자신의 신학적 부족을 극복하며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1883년부터 1897년까지 캐나다 온타리오주 나이아가라 호수에서 매년 여름에 열렸던 나이아가라 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 NBC)와 보스톤에 있는 클라렌돈 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인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Adoniram Judson Gordon)이 세운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Boston Missionary Training School, BMTS)를 들 수 있겠다.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통해 펜윅은 성경을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고 자신의 신학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펜윅이 1893년에서 1896년 사이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할 당시 그는 고든을 통해 선교훈련을 배우게 되어 그의 선교전략은 전반적으로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침례교 해외선교회(FMB)가 1987년 형성되기 전까지 한국침례교 선교의 핵심에 펜윅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펜윅 뿐만 아니라 펜윅으로 하여금 귀한 정신적 유산을 후세들에게 남기는데 원동력이 되게 하였던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아도니람 고든에 대해 살펴보길 원한다. 물론 특별히 펜윅이 한국선교에서 보여준 그의 선교전략의 강점과 취약점도 함께 언급 될 것이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하여 선교사로서의 소명과 헌신을 갖고 이방 사람 한국인에게 일평생 동안 복음의 파수꾼으로 삶을 살았던 펜윅과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아도니람 고든의 영향을 재조명하고 평가함으로서 그가 한국선교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또한 앞으로 한국침례교회가 어떻게 선교를 감당해야 할 것인지 방향성을 그의 선교사역을 통해 찾아보려고 한다.
III. 펜윅의 신학훈련 나이아가라 사경회
펜윅은 나이아가라 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하여 자신의 신학을 형성하였다. 펜윅은 공식적인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참석한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펜윅에게 있어서 마치 신학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1883년부터 1897년까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나이아가라 호숫가에서 매년 여름마다 정기적으로 열렸다. 나이아가라 사경회가 형성된 배경은 19세기 말 기승을 부리던 다윈의 진화론과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이 정통교리를 공격하자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강력하게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사경회는 퀸스 로얄(Queen's Royal) 호텔과 별관에서 열렸고, 사경회 총재인 재임스 브룩스(James Brooks)는 모임 장소가 편리한 교통과 편안하고 저렴한 숙박시설을 제공하였고 쾌적한 주변 환경으로 매력을 끌 수 있었다고 하였다.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부흥기(1883-1894)와 쇠퇴기(1895-1897)로 나누는데 펜윅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사경회에 참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펜윅이 그의 자서전에서 1886년 토론토에서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이후 나이아가라 호숫가에서 “여러 해 동안”(year after year) 성경을 공부하는데 몰두하였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펜윅은 캐나다와 미국에 1893년부터 1896년까지 3년간 머물고 있는 동안에 사경회를 다시 참석하였다고 본다. 펜윅은 그의 자서전에서 “1893년 나는 본 고향땅으로 돌아갔는데 이곳에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3년의 과정으로 기다리게 하셨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펜윅은 1886년-1889년 그리고 1893년-1895년 사경회를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이 사경회는 펜윅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펜윅은 그의 자서전에서 나이아가라 사경회의 “지도자들”(monarchs)을 통해 성경을 배웠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지도자들인가 하는 것이다. 사경회에서 강연한 수많은 강사들 가운데 특히 6명의 사람들이 펜윅의 선교와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이들이 바로 아더 피어선, 허드슨 테일러, 스코필드, 재임스 브룩스, 아도니람 고든, 그리고 존 채프만이다.
나이아가라 사경회의 가장 큰 이슈는 당연히 종말론이었다. 펜윅은 종말론 사상을 스코필드 박사로부터 배웠고 1883년 사경회에서 “주되신 예수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재림 사실이 분명히 이루어지기에 열심히 배울 것을 명하고 있다”며 종말론이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펜윅의 종말론의 특징은 전천년주의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취급하는 예언을 강조하였고 또한 사경회 쇠퇴기에 자주 논쟁 되었던 세대주의였다. 스코필드는 1888년 사경회에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류하는 것”이란 주제를 강연하여 최초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가 되었다. 펜윅은 1888년과 1894년 사경회 때 스코필드로부터 세대주의를 배울 수 있게 되었고 그가 1909년 사경공부를 시작한 것도 스코필드의 종말론을 이해한 이 후라 여겨진다. 펜윅의 종말론은 무엇보다도 교회성장에 큰 기여를 하여 1906년에 31개였던 교회가 1911년에는 162개로 1935년에는 200개 교회로 늘어났다. 또한 펜윅의 종말론은 선교를 활성화시켜 수종자들에게 만주, 시베리아, 몽골까지 가서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교하게 하였고 이것은 초기 한국침례교회로 하여금 선교부흥기를 맞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펜윅이 추구하였던 교회론은 브룩스의 영향이 컸다. 브룩스는 1883년 사경회에서 “형제들은 모든 교단적 편견을 전적으로 내려놓은 채. . .성령이 주신 영감 있는 말씀을 좀 더 배우기 위해 모여 들었다”며 초교파적 교회론을 강조했다. 펜윅은 브룩스의 영향으로 초교파적 교회론을 표명하는 대한기독교회를 1906년에 조직하였다. 나이아가라 사경회 지도자들이 19세기 말 북미지역에 있는 각 교파의 교회들이 더 이상 경쟁적으로 선교하지 않고 연합하자는 의미에서 초교파주의 교회론을 추구한 것을 펜윅이 한국에 그대로 반영시킨 것은 그가 한국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개신교가 소개되는 시점에 특정 교단의 이름을 빼 버린 채 선교한 것은 다른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심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은 반드시 시정해야할 펜윅의 전략이었다. 이처럼 한국 침례교회에서는 펜윅의 정체성에 관해 끊임없이 논쟁을 해왔다. 펜윅은 과연 침례교도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가 세우려고 했던 신약개념의 교회를 통해 알 수 있다. 사실 펜윅이 창립한 대한기독교회는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만을 지니고 있지 않고 마치 계급제도처럼 수직적으로 조직되어 있기에 교회정책적인 면에서 분석해 본다면 신약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신자의 침례의 관점에서 보면 대한기독교회는 침례교적이다. 예를 들어 펜윅은 그의 자서전에서 마른 버섯 다발을 파는 젊은 총각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자 그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이 사건은 펜윅에게 한국에서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술회했다. 펜윅은 무엇보다도 신자의 침례를 통해 순수한 신약교회를 세우려고 했고 이것이 그의 침례교 정체성이며 교회론 사상이다.
펜윅은 성서론을 고든 목사를 통해 배웠다. 고든은 성도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유익과 또한 신도들이 신조를 앎으로 얻는 유익을 서로 비교해 두고 있다: “성령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음으로 여러분 모두는 머리되시는 주 안에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 .성경은 신실한 말씀의 젖이고, 고백서는 응축된 말씀의 젖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은 인생나무의 열매이고, 신조는 통조림 속의 열매라 할 수 있다. 왜 이러한 고백서나 신조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것을 거절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통조림 속의 열매를 위해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고든으로 인해서 펜윅은 사경공부라는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다. 펜윅의 성서론의 특징은 성서 영감설과 문자적 성서해석을 따랐고 또한 성경읽기(독경운동)는 펜윅이 성경을 아끼는 마음의 표시였다. 즉 펜윅은 글자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축자영감설”(verbal theory)을 믿었고, 개화의 시기에 독경운동을 장려하여 전국적으로 확산토록 하여 문명퇴치 운동에도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펜윅은 성경은 읽는 것이지 연구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연구라는 것은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이며 사탄에 속한 것”이라 판단하고 성경 연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펜윅이 당시 배움을 갈망하는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었고 그의 부끄러운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펜윅은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특히 스코필드, 브룩스, 고든은 펜윅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전반적으로 나이아가라 “신학교”에서 종말론과 성서론은 어느 정도 펜윅과 대한기독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반면에 교회론은 그렇지 않은 편이었다.
IV. 펜윅의 선교훈련 아도니람 고든
펜윅은 왜 초기 한국기독교 선교사들 가운데 ‘시대를 앞서가는 선교사’가 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펜윅으로 하여금 척박하고 혼란스러운 한국 땅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훈련시키며 길잡이 역할을 해준 아도니람 고든(Adoniram Judson Gordon, 1836-1895)에게서 찾을 수 있다. 펜윅은 1893년부터 1896년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여 3년간 머물고 있으면서 보스톤에 있는 클라렌돈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인 고든이 운영하던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Boston Missionary Training School)을 통해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펜윅은 고든 학교를 통하여 신앙 선교, 오지 선교, 타종교 선교라는 선교 전략을 세울 수 있었고 이 전략은 초기 한국침례교회가 선교하는 교단이 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펜윅이 고든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 고든은 클라렌돈 교회가 격변하는 사회적 상황을 무시하지 않고 교회를 개혁시키는데 성공했다. 돈 많고 상류층이 중심인 교회에서 형식주의를 탈피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성도들이 직접 예배에 참여하도록 교독문 낭독과 대표기도가 끝날 즈음에 아멘으로 화답토록 하여 예배를 혁신시켰고, 또한 교회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좌석의 위치에 따라 100달러에서 15,000달러까지 값을 매겨 시행한 좌석임대 프로그램을 23년 만에 폐지시키는데 성공하여 교회의 이미지를 확 바꾸어 놓았다. 또한 자신이 부임하던 1869년에는 복음전도자와 선교사를 각각 1명씩 후원했지만, 1895년에는 복음전도자와 선교사를 각각 12명까지 후원하는 선교하는 교회로 변화시켰다. 이처럼 펜윅이 예배가 살아있고 선교가 용솟음치는 교회에서 훈련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었다.
더욱이 고든은 평신도들 가운데 소명은 있지만 시간이나 경제적 이유로 공식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중년층을 대상으로 교회 내에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를 1889년 10월 2일에 개원했다. 펜윅이 이 학교를 방문할 때에 그의 나이가 30대였기에 펜윅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교수진으로는 고든 박사와 피어선 박사와 예일대학교 출신의 채펠과 보스톤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던 재임스 그래이 등이 있었고 2년제의 교과과정으로 성서 및 실천신학, 성경 종합연구, 성서해석학, 특별성경연구, 성경읽기, 영적 삶과 크리스천 사역, 선교, 찬양과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이처럼 펜윅이 우수한 교수진과 최상의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학교를 통해 배움의 기회를 가졌는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고든 대학교 동창회 주소록, 1889-1975」의 규정에 의하면 “1년” 전임학생(full-time)에게 동창회 자격을 부여하지만 펜윅의 명단이 없는 것을 보아 그는 전천년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학교에 등록하여 공부하는 것조차도 아까워 임시학생이나 청강생으로 수업에 임한 것 같다.
또한 클라렌돈 교회는 사무엘 씽(Samuel B. Thing) 집사가 자기 딸 엘라(Ella)의 유언으로 딸에게 주려고 했던 상속금을 선교사를 위해 사용키로 함으로 엘라씽 기념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1885년에 발족되었다. 이 선교회는 리빙스톤 내지 선교회의 설립자인 그라탄 기네스(H. Grattan Guinness)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아프리카와 중국에만 선교사를 파송하다가 1895년부터 한국이 오지선교지로 선정되어 파울링 목사 내외와 가데린 양이 1차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듬해에는 스테드만 목사와 에클스 양과 엘머 양이 2진으로 파송되었다. 한국침례교회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은 엘라씽 선교회와 관련된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서 최초로 신자의 침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파울링 목사는 1896년에, 스테드만 목사가 1902년에 물침례를 행했고, 펜윅 또한 1903년 교사(敎師)로 임명받기 전 침례를 받아야 할 신명균에게 1901년 4월부터 1902년 12월 사이에 물침례를 행했다고 본다. 이 세 가지 침례식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가 조직되기 전에 실시되었기에 그 동안 논쟁되어진 펜윅의 침례교 정체성은 펜윅의 신자의 침례로 그를 당연히 침례 교인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펜윅이 고든으로부터 배워 한국에 적용한 요소들은 무엇일까? 첫째가 성령께 직접 기도하면서 의존하는 신앙선교였다. 고든은 “가톨릭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를 교회의 관계에 중점을 두지만, 개신교는 신자가 교회에 대한 관계를 그리스도의 관계에 강조점을 둔다”며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선교를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펜윅에게 전달되어 선교비를 성도들에게 요구치 않고 믿음으로 해결케 하였고 이로 인해 초기 한국침례교 선교사들은 믿음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선교하는 상징이 되었다. 둘째는 오지선교로 고든은 학교를 세울 때 “초교파적으로 복음적으로 오지선교가 주는 유익함을 얻기 위해 집중할 것이다”라는 원리를 발표했다. 이 원리에 따라 당시 100명의 졸업생 중 25명이 아프리카, 인도,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오지로 파송되었고, 펜윅 역시 이 원리를 받아들어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눅14:23)라는 슬로건으로 선교사들을 만주, 시베리아, 몽골 같은 오지로 파송하여 초기 한국침례교회가 선교부흥을 맞도록 했다. 셋째는 타종교 선교로 19세기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방 이주민들이 교회에 큰 도전이 되자 고든은 먼저 유대인 선교에 박차를 가하여 1891년 4월 보고에서 한 유대인이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했고, 1893년에는 중국의 불교신자였던 심주에(Juee Sim)가 중국인 최초로 침례를 받고 간증하였다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확인한 펜윅 역시 한국으로 돌아와 엘라씽 선교회를 1901년에 인수하고 난 뒤 한학자로서 학식이 풍부하고 예의바른 신명균을 양반도시인 공주에 파송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문화우월주의로 신명균에 대한 편견을 지녔지만 고든의 타종교 선교가 펜윅의 마음속에 영향을 끼쳤기에 신명균을 파송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결과 신명균으로 인해 12개 교회가 개척되는 선교열매를 맞보게 되었다.
고든은 자유신학이 확산되어져 가는 19세기 말에 예배를 회복하고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탈바꿈시키며 보스톤에 산업기지를 세워 미주지역에 금주운동 확산시키는 영향력 있는 목사였다. 이를 목격한 펜윅은 고든의 전략들이 고스란히 그의 사역에도 묻어져 나왔다. 고든처럼 영혼구령을 강조하는 전도명령을 추진한 결과 200교회를 개척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고든과는 달리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문화명령에는 너무나 부정적 태도를 취하여 당시 음주, 담배, 아편과 같은 사회악을 뿌리 뽑고 정화시키는데 장로교와 감리교의 독점물이 되게 하여 개화의 주축이 되지 못한 점은 펜윅의 선교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해외선교회(FMB)가 창립되기 전까지 한국침례교회의 선교핵심 인물은 당연히 펜윅이다. 그는 45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선교유산을 남겨 놓았다. 펜윅은 고등교육을 받은 다른 동료 선교사들처럼 교육선교나 의료선교와 같은 유형의 유산을 남겨 주지는 못했지만 신앙선교, 오지선교, 자립선교, 토착화선교, 문서선교와 같은 정신적 유산을 물러 주었다.
이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강한 열정이 있는 펜윅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둔감하여 한국이 쇄국의 빗장을 풀고 개화가 막 일어나던 때에 크리스천들이 마땅히 참여해야 할 사회봉사와 책임을 외면한 것이나, 기독교가 처음으로 소개되던 시기에 소속된 교단도 없이 초교파적인 신앙을 강조한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펜윅의 선교전략의 실책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각자 활동하면서 거둬들인 선교열매를 비교해 본다면 펜윅은 결코 다른 선교사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가 1935년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후원교단이나 다른 선교사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약 200개의 교회를 개척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클리포드 클락(Clifford Clark)은 펜윅을 ‘한국 선교의 혁신자’로 불렸다. 한국침례교 선교사파송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시대를 앞서 간 선교사’ 말콤 펜윅의 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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