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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논문 등록일 2011-03-24
작성자 관리자 (admin)
펜윅의 신학사상과 초기 한국선교에 관한 연구
안희열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Ph.D.)
1. 들어가는 말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 그는 초기 한국선교에 있어서 ‘시대를 앞서 간 선교사’ 였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교단의 배경도 없이 한국에 와서 46년 동안 사역하면서 그가 남겼던 산업선교, 초교파주의, 오지선교, 현실적 유일주의와 같은 위대한 족적(足跡)은 19세기 말 한국에 와서 선교했던 다른 선교사들과 비교해 봤을 때 크게 앞선 사상이었다. 펜윅의 최종 목표는 한국선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만주, 몽골, 시베리아 등지의 동북아시아 선교에 꿈을 꾸며 한국을 선교 전진기지로 삼고 추진했던 그의 선교정책은 분명 시대를 앞서 갔다.
하지만 펜윅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는 펜윅 스스로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처럼 파송 교단을 갖지 못했고, 든든한 후원교회도 없었으며, 정통 신학교를 졸업하여 분명한 신학사상을 가지고 사역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에서 개신교가 막 소개되던 시점에 어느 한 교단에 얽매이지 않고 초교파적인 성격을 띤 그의 선교방향은 교단 중심적인 한국교회에서 거의 잊혀진 선교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윅은 한 영혼을 주님 앞에 드리려는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가 1935년 한국 땅에서 뼈를 묻고 주님의 품으로 갔을 때 단신의 몸으로 약 200개 교회를 개척하고, 250명의 현지인 지도자를 세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클리포드 클락(Clifford Clark)은 펜윅을 ‘한국 선교의 혁신자’로 불렸다.
펜윅으로 하여금 선교사의 소명과 열정 그리고 인내의 열매를 맺도록 한 것은 두 개의 큰 기둥이 그를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나이아가라 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로 펜윅에게 신학교 기능을 담당하며 성경을 알게 하였고, 두 번째는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Boston Missionary Training School)로 펜윅에게 선교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본고(本稿)는 초기 한국선교사 가운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늘 아쉬움을 지녔던 펜윅 선교사의 신학사상을 연구하고 그 특성은 무엇인지, 초기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 볼 것이며, 그리고 펜윅이 한국선교에 끼친 영향 가운데 긍정적인 요소는 무엇이며 부정적인 면은 어떤 것인지 연구하고 평가하여 앞으로 한국선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다만 본고에서는 펜윅의 생애와 침례교의 정체성을 지닌 선교사로서의 연구는 여백 상 다루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둔다.

2. 펜윅의 신학사상
펜윅은 자신의 신학사상을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통해 형성했다. 특별히 종말론, 교회론, 성서론은 이곳에서 만들어 졌고, 그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 이전 공식적인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참여한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마치 신학교와 같았다.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1883년부터 1897년까지 매년 여름에 성경을 정기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 온타리오주 나이아가라 호숫가에 있는 퀸스 로얄(Queen's Royal) 호텔에서 열렸다. 펜윅은 처음 평신도 선교사로서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이 모임에 참석하였고, 또한 그가 1893년부터 1896년 사이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사경회에 참석하며 목사 안수도 받았다. 펜윅의 신학은 어느 한 개인을 통해 영향 받기보다는 여러 지도자들의 신앙에 기초하였다. 그의 신학 형성에 크게 영향을 준 나이아가라 지도자들은 사이러스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제임스 브룩스(James Brooks), 아도니람 고든(Adoniram Judson Gordon),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였다.

2.1 세대적 전천년주의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서구 선교사들은 무디 부흥회, 멕코믹 신학교, 나이아가라 사경회, 학생자원선교운동(SVM) 출신들이 많아서 전천년주의 사상을 지닌 선교사들이 대다수였다. 펜윅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별히 그는 세대적 전천년주의자였다. 펜윅의 전천년주의 종말론은 그의 자서전『대한기독교회사』(The Church of Christ in Corea)에서도 잘 나타나 있어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그리스도의 재림을 취급하는 예언을 많이 강조하였다: “대 환란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사탄이 옥에서 놓이게 될 것이며 곡과 마곡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전천년주의 재림은 성경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마24:24-30; 계12:7-12; 19:11-16.”
세대적 전천년주의자들처럼 펜윅 역시 환란전 휴거설을 강조했다. 펜윅은 “우리 敎會가 僞 基督 前에, [아니면] 죽음을 받은 後에 가겠습니까? 아무쪼록 그 前에 가게 합시다”라며 환란 전 휴거설을 주장했다. 펜윅은 대 환란이 오기 전에, 즉 적그리스도가 활동하기 전에 교회가 휴거할 것임을 믿었다. 그렇다보니 펜윅의 세대적 전천년주의는 교회성장에 큰 기여를 했는데 그의 임박한 종말론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하였고, 그 결과 그가 개척한 교회의 수는 급격하게 팽창하였다. 1906년에 31개에 불과하던 교회가 1911년에는 162개로 1935년에는 200개의 교회로 늘어났다. 이처럼 전천년주의 신앙은 영혼을 구원시키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또한 펜윅의 세대적 전천년주의는 해외선교를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펜윅의 오지선교 정책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만주, 시베리아, 그리고 몽골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강요했는데 1906년에는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로 한태영을 북간도에 파송한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하였다.
더욱이 펜윅의 세대적 전천년주의는 모든 박해와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펜윅 교회의 32명 지도자들은 일본제국이 한국 사람에게 강요했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자 1942년 6월 10일에 원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세대주의적 종말론 신앙으로 인해 동아기독교는 해방을 맞기 1년 전인 1944년 5월 10일에 그만 교단폐쇄령을 당하고 말았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옥교를 치르면서 즐거워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대 환란 전에 교회의 휴거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펜윅은 “고생은 하나님께로 왔고, 세상에서 왔고, 교회에서 왔다”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고난을 두려워한다면 진정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종말론 신앙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어떤 고난도 거뜬히 이겨내도록 하였다.

2.2 초교파주의
펜윅이 탈교단적 초교파주의를 지향한 것은 나이아가라 사경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나이아가라 사경회 총재인 제임스 브룩스는 첫 사경회인 1883년 모임 때부터 초교파적 모임의 성격을 강조했다: “형제들은 모든 교단적 편견을 전적으로 내려 놓은 채. . .성령이 주는 영감 있는 말씀을 좀 더 배우기 위해 모여 들었다.” 미국 개신교회가 탈교단적 선교를 지향한 것은 사역의 경쟁과 중복이 심해 탈피하기 위함이었다. 나이아가라 사경회의 영향을 받은 펜윅 역시 한국에 오자마자 처음부터 그는 교단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창립할 때도 교단의 색체를 띄지 않았다: “우리는 교단 명칭을 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하였는데 ‘대한기독교회’로 하였다. 이 뜻은 ‘한국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 라는 말이다.” 이후 교단 이름이 동북아시아 선교에 걸맞게 동아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대(1933년), 동아기독교(1940년)로 바뀐 것을 보아 알듯이 초교파적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미국교회와는 달리 한국은 상황이 달랐다. 한국은 이제 막 개신교회가 소개되는 시점에 펜윅이 초교파주의를 조직한 것은 너무 앞서갔다. 펜윅이 나이아가라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인 고든 목사를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고든은 초교파적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미국 북침례교단의 해외선교회 회장을 맡아 교단의 선교 부흥을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1887년 연차총회에서 아도니람 고든의 제안 하에 메사추세츠 침례교 총회에서 해외선교회에 투입할 자금을 결정하는데 매년 1만 달러를 넘지 않는 액수가 앞으로 10년간 투자되어 이들이 결정하는 장소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거나 모임 장소를 결정짓는 일에 똑같은 비용이 지출될 것을 결의하였다.” 펜윅이 처음부터 고든처럼 교단 중심의 선교사역을 처음부터 추진했더라면 그의 선교 열매는 기대한 것 이상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2.3 문자 영감설
문자 영감설(verbal theory)이란 성경을 해석할 때 내용이나 메시지보다는 글자 한자 한자의 정확성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성경해석법으로 축자영감설이라고도 한다. 펜윅은 그의 저서『잔속에 든 생명』(Life in the Cup)에서 자신을 존 하퍼(John Harper)라는 목사로 등장시켜 문자 영감설을 주장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하퍼 목사는 처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두 개의 단어, 즉 bathoola와 halmah가 있음을 발견했다. 전자는 약혼을 하지 않은 처녀를 의미하고, 후자는 약혼한 처녀를 의미한다. . .엘리에셀이 이삭의 신부를 구하려고 찾고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약혼하지 않은 처녀, 즉 bathoola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하퍼 목사는 발견했다. 엘리에셀의 기도가 하나님께 즉시 상달되자마자 엘리에셀은 리브가에게 약혼선물을 주고 그녀의 집으로 안내 받았을 때 엘리에셀은 리브가를 halmah 즉, 약혼한 처녀로 호칭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펜윅의 문자 영감설은 고든 목사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자신이 성경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것의 가장 큰 열매는 사람들 사이에 독경운동(讀經運動, 성경읽기)을 확산시켰다. 구전에 따르면 젊은 아낙네들은 신약성경을 약 30회 정도 읽었고, 노인들은 신구약 성경 모두를 200번에서 500번 정도 혹은 1천 번 정도 읽은 자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르네상스” 시대에 독경운동은 문맹을 타파하는데 큰 기여를 했는데 1910년에는 구약이 한국어로 완역되었고, 1911에는『성경전서』가 출간되었고, 1919년에는 원산번역이라고 불리는『신약전서』가 펜윅에 의해 출판되었다. 한국어 성경이 잇달아 출판됨으로 모든 개신교 교회들은 독경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성경공부에 관한 관심이 1905년부터 1934년까지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까지 확산되었고, 이 기간 동안 펜윅의 독경운동은 문맹타파에 큰 일조를 했다.
하지만 펜윅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성경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읽은 것이라고 펜윅은 주장하면서 “연구”는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이며 사탄에게 속한 것과 같다고 정의를 내렸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단지 성경을 암송하도록 훈련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활발하게 하고 나아가 성경을 비평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하며 비교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책임성 있는 사고를 지닌 활발한 신앙은 기독교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고 복음의 수동적인 동화는 아니라는 예기다. 하지만 펜윅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게 하였지 연구토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가 고든 목사를 통해 문자 영감설을 배웠다면 고든 목사가 저술가로서 편집장으로서 뛰어난 성경해석자로 활동한 것처럼 자신도 성경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자로 헌신했더라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2.4 현실적 유일주의
펜윅의 구원론은 유일주의자이다. 구원론은 유일주의, 포괄주의, 보편주의, 다원주의라는 4가지 종교신학으로 나눠진다. 이 4가지 가운데 펜윅이 유일주의에 해당되는 이유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에비 스미스(Ebbie Smith) 박사는 그의 기사 “종교신학에 대한 복음적 접근”에서 유일주의자들을 완고한 유일주의자들, 불명확한 유일주의자들, 희망적 유일주의자들, 현실적 유일주의자들로 분류하였는데 펜윅은 현실적 유일주의자들에 속한다. 현실적 유일주의자들처럼 펜윅은 성경계시의 전적인 권위와 신뢰성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없다고 믿고 있다. 또한 펜윅은 두 번째 기회라든가 사후전도라든가 타종교에서의 구원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펜윅으로부터 복음을 소개 받은 한 비신자가 펜윅을 떠나버린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조상들이 그들의 죄로 인해서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적 유일주의자들은 종교와 일반계시가 이들과 기독교간의 접촉점을 갖게 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접촉점은 다른 종교 추종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지만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실적 유일주의자들은 이러한 점이 완고한 유일주의자들과 달랐는데 펜윅이 그러했다. 펜윅은 현실적 유일주의자들처럼 타종교인과 접촉하기 위해 한국의 전통 종교를 악하다거나 가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과 기독교 사이에 접촉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타종교에 속한 비신자들을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들을 복음화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통 종교 가운데 하나인 유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한국인들]의 윤리는 주로 공자의 유교에 기초해 있으며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빼놓고 생각해 본다면 한국과 중국 문화는 서구문화보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해 온 게 사실이다.” 펜윅은 현실적 유일주의자로서 그가 주장했던 두 가지 사상, 즉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것과 접촉점을 발견하는 것은 선교의 불을 지피는데 큰 공헌을 했다.

3. 펜윅의 긍정적인 선교영향

3.1 산업 선교
펜윅이 초기 한국교회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 중의 하나가 산업 선교였다. 펜윅이 1891년 원산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그가 구입한 산업 농장은 그 지역 공동체를 개발하고 도움을 주는 데는 최상이었다. 펜윅이 원산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당시 원산 시장인 윤치호(1865-1945)는 “나는 이 지역의 침례교 선교사인 말콤 펜윅 목사와 함께 일하고 있으며 [원산농장에서 거둬들인] 과일이 잘 자라서 수확 중에 있다”고 회고했다. 수확한 과일은 학교 커리큘럼에 의해 원산의 공립학교에 공급되기도 하였고,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수출되기도 하였는데 이 때 2말에 15루불 정도로 팔려나갔던 원산 과일은 금 한 배럴에 25달러의 값과 맞먹는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원산성경학교에서 공부하던 그의 제자들이 펜윅을 “3박사”­농학박사, 의학박사, 측량박사­로 별칭한 것으로 보아 알듯이 펜윅은 일찍부터 농법(農法)에 박식하였고, 당시 원산에 산업선교로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선교지에서 필요한 물질은 가능한 외부에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텐터메이커처럼 자기 스스로 일어서려는 자립 선교는 시대를 앞서간 선교전략이었다.
한편 펜윅의 산업 선교는 한국인들에게 근로의 소중성을 일깨워주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은 양반, 상인, 천민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펜윅은 산업선교를 통해 그리스도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섬김(servant)의 정신을 몸소 한국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채소밭을 만들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인 내가 옷을 벗고 노동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동양인의 사상에는 선생이나 선비는 어떤 경우에도 육체노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서양의 계급제도가 그 폐쇄적인 사상을 이방 문화에서 빌려 온 것이 아닌지 의심이 날 정도였다. 50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는 사람은 세 사람 뿐이었는데 내가 고용한 한국인 두 명과 나였다.“
한국에 개신교가 처음 소개될 즈음에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을 파송한 본부나 후원교회에 의존하여 교회를 세우거나 병원을 지었다. 하지만 펜윅은 달랐다. 당시 펜윅이 자립 선교(self-supporting)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대단한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1891년 원산농장을 시작하여 1926년 농장을 매매하기 까지 거의 35년 동안 펜윅은 외부의 기독교 단체나 후원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산업 선교사였다. 펜윅보다 거의 1세기 앞서 농업과 원예와 인쇄술 등을 인도사회에 소개하여 가능한 선교비를 현지에서 조달하려고 애섰던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와 같이 펜윅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산업 선교사라 할 수 있다. 펜윅이 서양의 과일과 채소를 소개하고 농업의 혁신을 이끌어간 것은 선교사가 단순히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보다 선교지에서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현지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 있었고 점차 사람들을 접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3.2 오지 선교
펜윅의 오지 선교는 한국 장로교와 감리교가 1892년에 결성했던 선교지 분할협정(Comity Arrangement)에 대처할 전략이 필요함으로 생겨났다. 당시 선교지 분할협정은 한 지역에서 여러 교단의 활동과 선교 정책의 중복을 피해 선교사 개인뿐만 아니라 각 교단의 자원이 불필요하게 손실을 입지 않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펜윅은 선교지 분할협정으로 인해 누가복음 14장 23절의 “길과 산울가로 나가라”의 말씀과 같이 타 교단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또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던 만주나 시베리아 그리고 몽골 같은 동북아시아의 오지 지역에 선교사를 대대적으로 파송하였다. 펜윅이 이처럼 오지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든 목사의 영향이 컸다. 그가 1893년에서 1896년 사이 3년 동안 미국을 방문하면서 고든 목사가 학교를 통해 아프리카, 인도, 중국과 같은 오지 지역에 선교사를 집중적으로 파송하는 것을 보았고, 고든이 오지 선교의 열매를 클라렌돈 교인들과 함께 나누며, 이들에게 세계선교의 비전을 제시하여 선교에 헌신토록 하는 것을 보면서 오지선교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펜윅은 1894년에 한국순회선교회(CIM)를 조직하여 오지 선교의 정책을 선교회의 원리 선언문에 포함시켰다: “이제 선교지에서 다른 선교단체나 선교사들과 충돌을 겪지 않고 한국 전 지역에 복음을 직접 전할 수 있는 열린 문과 넓은 장소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순회선교회의 커다란 목적이다.” 그래서 펜윅이 자기 제자들을 “열린 문과 넓은 장소”로 파송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를 말할까? 펜윅이 말하는 오지지역은 다음과 같다: “아마 선교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더욱 흥미로운 일은 한국의 ‘북쪽 끝’인 국경지역에서의 사역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이곳은 두만강을 넘어 광활한 중국 대륙이 시작되는 곳이며, 러시아가 그들의 땅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 밖의 대양으로 진출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열망으로 국경을 확장시켜 온 곳이기도 했다. 이곳의 사역은 주변 상황과 하나님께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들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펜윅은 한국이 오지지역인 만주와 시베리아와 몽골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교(架橋)라 여겼기에 한국을 북방선교의 토대로 삼았다. 그의 선교 개념은 한국에만 교회를 세우는 것 보다 오지지역에 교회를 세우는데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1940년에 그의 제자들은 80개 교회를 국내에, 100개 교회를 오지지역에 세웠다고 한다. 펜윅은 당시 서구의 동료 선교사들이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도시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그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남들이 가기 싫어하던 산간벽지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의 제자들 중에 약 60%가 오늘날 미전도종족에 가까운 오지 지역에서 선교했다.
1989년 로잔II 선교대회 때부터 랄프 윈터(Ralph Winter) 박사가 주장한 미전도종족 선교가 요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2006년 선교한국과 2007년 KWMA의 선교주제가 “개척선교”(frontier missions)였는데 바로 미전도종족 선교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펜윅은 일찍부터 남들이 싫어하는 곳에서 개척선교를 했다. 그의 오지 선교는 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는데 바라기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펜윅의 개척정신을 회복하여 복음을 듣지 못한 World A 지역에 더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기를 바란다.

3.3 타종교 선교
펜윅이 선교할 당시 한국은 샤머니즘, 유교, 불교에 빠져있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전도하지 않고는 한국을 복음화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가 마침 미국을 방문할 당시 고든 목사가 보스톤 지역에 물밀 듯 이민 온 유대인들과 중국의 불교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선교하는 것을 보았다. 고든 목사의 타종교에 대한 선교 전략은 훗날 펜윅으로 하여금 다른 종교에 심취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접근하여 말씀 안에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할 것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 다음해인 1897년 펜윅이 황해도 소래에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방문했던 소래교회는 원래 마을 사람들이 갖가지 복을 빌거나 마귀를 숭배하던 성황당이 있던 곳이었다. 그만큼 샤머니즘이 강한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가 우뚝 선 것이다. 강한 영성이 필요했던 그곳에 펜윅을 통해 은혜 받은 자가 무려 3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아직 무속 신앙에 빠져 있던 자들도 펜윅의 사경회를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곳의 여성들은 여전히 샤머니즘에 빠져 있었는데 펜윅의 간증을 보면 안씨의 부인[이순도]은 이러한 여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더욱이 펜윅의 타종교 선교는 그의 첫 제자였던 신명균을 유교의 심장부였던 공주에 파송하면서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되었다. 신명균은 유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양반 계급의 서울 태생으로 한학자였고, 군관학교를 졸업한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1903년 2월 10일 펜윅은 공주성경학교를 개원하고 신명균을 이곳 학교의 책임자로 파송하였다. 이곳은 배우기를 좋아하는 유교인들을 접근하는데 최고의 곳이었고 신명균은 적합하였다. 같은 해에 약 30명의 학생들이 학교에 등록하였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 학교에서 많이 배출되어 훗날 대한기독교회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신명균은 공주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섬기는 삶 때문에 많은 유교인들을 감동시켰다: “나중에 이[신명균] 가족은 사역의 중심지로 이사를 했고 집은 역시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진흙 벽돌과 초가지붕을 한 이 오두막집은 사방은 6자이고 넓이가 3자인 베란다가 있고 부엌을 만들기 위해 장대를 한쪽 끝에 모아 기대 세우고 집으로 덮어 두었다.” 유교는 사실 넓은 의미에서 공자가 가르친 대로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사상을 이루려는 총체적 시스템인데, 이 원리가 신명균에 의해서 공주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교회는 존경과 예의범절의 모범이 되었다. 이 교회의 성도들은 동양의 예의범절을 갖추도록 모두다 훈련을 받았고, 이들은 매일 훈련시킨 이 작은 촌뜨기 양반도 어떤 허점도 보이질 않았다.” 신명균에게 있어서 공주에 사는 유교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바른 예의가 첫 번째였고, 전략은 두 번째였다. 바로 이런 접근법이 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3.4 토착화 선교
민경배 교수는 그의 저서『한국교회사』에서 펜윅은 한국기독교에 있어서 토착화를 이룬 거장(巨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멜빈 하지스(Melvin L. Hodges)는 토착화란 “선교사역의 결과로 한 교회가. . .세워지고 스스로 관리할 수 있고, 스스로 후원할 수 있고, 스스로 현지인 교회를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펜윅은 한국에 온지 13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토착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펜윅은 원산에서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한 후 신명균을 공주성경학교의 원장으로 파송할 때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파송했다: “신[신명균] 선생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신 선생을 ‘구별’하여 일을 시키기 위해 의심이 가득한 내게 옹색한 동의를 얻어내신 것이다.” 이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그 이유는 신명균이 성경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일꾼으로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토착화의 결과에 대해 “내가 실패한 곳에서 어디서든지 현지인 목사[신명균]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하였다”고 펜윅은 술회하고 있다. 토착화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는 해마다 자신의 생각대로만 선교를 해 성공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펜윅은 “동양인에게는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의 방법이 어울린다. 이것은 마치 잘 익은 과일에서 아름다운 꽃을 따버리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펜윅은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함으로 훗날 자문화우월주의(ethnocentrism)를 과감히 버리게 했고 드디어 토착화 선교를 할 수 있었다.
펜윅은 무엇보다도 토착화 원리를 통해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다. 펜윅은 신명균 목사가 훈련시켜 배출한 12명의 현지인 지도자들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지녔다. 펜윅은 “신 목사가 배출한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은 목사가 되고 두 사람은 비서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실제적이며 열심히 일하고 영적으로 충만하며 성경에 박식하고 건전한 사고를 지닌 헌신적인 크리스천이었다”고 술회했다. 그 중에 한명은 손필환으로 이 사람은 신 목사가 성경학교 밖에서 훈련시킨 후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장석천은 신 목사가 성경학교 내에서 훈련시킨 사람이었다. 훗날 이들은 현지인 지도자인 신명균이 배출한 최초의 현지인 일꾼이었다. 왜냐하면 이들 두 사람은 펜윅의 토착화 원리를 통해 배출된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대한기독교회가 현지인 지도자들을 생산해 내는 서막의 징조가 되었다.
펜윅은 또한 토착화 성경번역자로서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9년 10월 18일에 오늘날 “원산번역”으로 알려진『신약젼서』를 출판했는데, 이 원산번역은 한국의 서민들이 사용하는 한글로 번역되었고 한국의 양반사회에서 오랫동안 써왔던 한자는 배제되었다. 원산번역은 서민들이 즐겨 사용하던 언어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채용하여 번역된 성경이었다. 원산번역의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들을 보면 펜윅의 토착화 성경번역을 알 수 있는데 “처녀”를 “새악시”(마1:23)로, “석청”을 “산꿀”(마3:4)로, “서기관”을 “선비들”(마5:20)로, “열두지파”를 “열두집”(마19:28)으로, “대인들”을 “두목들”(마20:25), “총독 앞에”를 “관찰 앞헤”(마27:11)로 번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산번역의 취약점이라면 인명과 지명이 한국성경번역위원회의 것과 일치하지 않아 혼란을 유발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펜윅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토착화 성경번역에 중요한 공헌을 한 선교사였다. 펜윅의 토착화 선교는 점차 현지인 일꾼들을 많이 양성하게 되었고 교회성장을 이끄는 중추역할을 감당하였다.

4. 펜윅의 부정적인 선교영향

4.1 세상교육 반대
펜윅의 선교사역 가운데 가장 약한 부분이라면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것이다. 펜윅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빠져 임박한 재림사상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1926년 제12차 대화회[총회]부터 대한기독교회의 자녀들을 공립학교에 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는 실과를 아는 것이 사람을 어리석게 하고(창3:22), 죽이게도 한다(고후3:6)며 세상교육을 반대하였다. 펜윅은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성경공부가 아닌 세속적인 모든 교육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제자들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아이들부터 먼저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하였고 성경만을 반복적으로 읽도록 강요하였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에게 대한 펜윅의 결정은 미래에 발생할 아픔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사실 펜윅이 공공교육을 금지시킨 것은 나이아가라 지도자들과는 다른 견해였다.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다윈의 진화론과 당시 신학적 자유주의를 막기 위해 조직되었고, 이러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보호하려는 움직임으로 번져나갔다. 그래서 나이아가라 지도자들은 학교를 세우는데 아주 활동적이었다. 무디성경학교는 1886년에 시카코에서 문을 열었고, 이 학교의 교수는 나이아가라 지도자였던 어드만, 무어헤드, 고든, 카메론이 교수로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고든 목사는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를 1889년에 설립해서 신앙을 보호하며 복음을 정확히 가르치는데 애를 썼다. 이들은 변화하는 세속 문화를 이해하는데 폐쇄적인 마음을 지니지 않았고 오히려 수용적이었다.
나이아가라 지도자들과는 달리 펜윅은 세상 문화를 이해하는데 너무 부정적이었다. 당시 모든 학교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쳤고 일본식 교육을 강요한 것은 사실이다. 펜윅이 세상교육을 금지시킨 것에 관해 두 가지 설(說)이 있다. 첫 번째로 일본식 교육설이다. 이명희 교수는 펜윅이 당시 세상 교육을 반대하였던 이유는 펜윅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육을 무시했던 일본식 교육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로 두려움설이다. 조효훈 박사는 펜윅이 세상 교육에 냉담했던 이유는 그의 제자들이 공공교육을 받음으로써 스승인 펜윅 자신을 무시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펜윅은 결국 1926년 기술교육을 위해 사들인 원산 농장조차도 모두 팔아버렸다. 펜윅이 기술교육을 포기한 이유는 세상교육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지도 못한 결정은 펜윅과 그의 제자들에게 치명적으로 타격을 입혔다.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그는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져 나갔다. 펜윅은 동료 개신교 선교사들처럼 자신의 띄어난 농학 기술로 한국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했지만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포기해 버렸다. 이러한 결정은 훗날 그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큰 손실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2 사회참여 무관심
펜윅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 관심에 별로 흥미를 두지 않았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기독교인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펜윅이 선교했던 19세기 말경 한국사회는 개화의 물결이 막 일어나는 시기여서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눈에 크게 띄었다. 성(性) 차별 반대가 확산 되었고, 첩 제도가 사라졌으며, 어린나이에 결혼하는 풍습도 폐지되었다. 더욱이 여성교육을 실시함으로 많은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감으로서 여성들은 점차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 여성들을 무지와 배척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스크래톤(Scraton) 여사는 1886년 5월에 이화학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YMCA에서 주도한 산업교육은 1906년에 처음 실시되면서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산업교육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성과 상관없이 인쇄업, 목수업, 철공업, 구두수선, 사진업무와 같은 분야에서 밤낮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기술 및 직업교육은 한국 사람들에게 “산업의 긍지, 돈과 시간의 가치, 경제발달의 필요성” 이라는 건전한 개념을 갖게 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기술교육의 확산으로 인해 음주, 담배, 아편과 같은 사회악을 뿌리 뽑는데도 큰 일조를 감당하였다. 그래서 초기 개신교회는 사회 정화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펜윅 역시 처음에는 원산 농장을 통해 사회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공교육 반대로 농장을 매매하였고, 그 이후부터 그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 당시 펜윅은 고든 목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펜윅과 고든의 공통점은 급변하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고든 목사는 “천국 시민권”(Heavenly Citizenship)이란 글을 기고하여 “전천년주의자들은 두 개의 세상, 즉 현재와 다시 올 세상에서 삽니다. 성도들은 영원한 천국의 시민권을 얻을 것을 기억하면서 이 땅 위에서는 세금을 내야하고, 투표도 해야 하며, 투자를 함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고든은 도덕적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적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심정적으로 멀어진다 할지라도 좋은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고 확신을 했다.
19세기 미국사회처럼 한국사회도 역시 개화의 바람으로 사회가 급속도록 변하고 있을 때 펜윅이 영혼구령을 함께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 하지 않고 함께 했더라면 그의 선교열매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그가 대한제국 말엽에 변화하는 한국정세를 정확하게 꽤 뚫어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5. 나가는 말

시대를 앞서 간 선교사 말콤 펜윅, 그가 1935년 12월 6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46년 동안 전천년주의 종말론에 사로잡혀 영혼구령과 교회개척에 일생을 바쳤고 72세의 일기로 원산자택에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펜윅은 자신의 백골(白骨)이 우상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 무덤은 봉분(峰憤)하지 말고 평장으로 하라”고 유언을 남겼을 만큼 겸손하였다. 그의 한국선교는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두 가지 중요한 선교 유산을 남겨 주고 있다. 첫 번째는 선교의 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인데 펜윅은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사실 펜윅이 최초의 현지인 지도자 신명균을 길러내는데 무려 13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오랜 인고(忍苦)의 세월이 흐른 후에 얻은 귀한 열매였다. 펜윅은 자서전에서 고백하기를 선교사우월주의가 현지인을 길러내는데 무서운 독(毒)이라는 사실을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토로하였다. 그가 긴 인고의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명(calling)이 분명치 않았더라면 펜윅은 언제든지 선교를 포기했을 것이다. 바로 그렇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급선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명확한 자들을 선교사로 파송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펜윅이 보여준 무형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사실 펜윅은 당시 동료 선교사들과는 달리 그의 제자들에게 학교선교나 의료선교와 같은 유형의 유산을 남겨 주진 못했다. 하지만 산업선교, 오지선교, 타종교선교, 토착화선교와 같은 전략으로 한국교회에 금보다 귀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펜윅의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한국교회 선교사들에게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이들은 21세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주요한 일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펜윅이 우리에게 물려준 무형의 유산을 잘 간직하고 개발하고 승화시켜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열방과 종족들에게 개척선교(frontier mission)의 정신으로 복음의 꽃을 피운 말콤 펜윅 선교사를 본받는다면 한국선교의 미래를 밝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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