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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논문 등록일 2011-03-24
작성자 관리자 (admin)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100년 평가
안희열 교수(침신대 선교학)
안희열 교수(침신대 선교학)

들어가는 말

2010년은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린지 100주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에딘버러에서는 2010년 6월 2일부터 6일까지 선교대회를 개최해 학술연구와 축제를 함께 열 계획이고, 한국에서도 내년 6월 22일부터 25일까지 한국대회를 개최하려고 이미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진행 중에 있다. 1910년은 예일대학교의 선교역사학자인 케네스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 박사가 지적한대로 “위대한 세기”에 해당되어 기독교의 확장이 한창 일어나던 시기로 서구선교사 대회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기는 근대선교운동의 아버지인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1792년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BMS)를 결성하고 인도로 파송 받은 이후 교단 선교회나 선교단체가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하여 개신교 선교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선교사들의 과다 경쟁과 사역 중복은 오히려 화근이 되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 감리교 평신도였던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는 젊은 시절부터 학생자원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과 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YMCA)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세계여행을 두 번씩이나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세계선교의 흐름과 방향에 눈을 뜨게 하였고 연합과 일치만이 살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모트는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280만 km를 여행하였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지구를 68바퀴나 돌 정도였다고 한다. 모든 교회와 선교단체가 더 이상 경쟁하지 않고 서로 연합할 것을 당부하기 위해 그는 인도, 중국, 일본, 브라질,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 등지를 방문하였고, 한국 역시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특별히 1907년 1월부터 4월까지 한국을 방문하면서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연합과 일치의 정신은 마침내 1910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림으로 모트의 비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참석한 대의원도 1,200명이 등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선교회나 선교단체도 무려 160개나 참석하여 큰 호응을 보였다. 감사한 것은 한국대표도 15명이나 참석해 초기한국교회의 선교를 상세하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본 논문은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역사적 배경, 대회의 주제, 대회의 준비 및 운영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본고(本稿)에서는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8가지 주제들을 평가하여 긍정적인 영향을 준 요소와 수정·보완해야 할 부분들을 소개하여 21세기 한국선교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다만 여백 상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8가지 주제 내용들을 상세하게 다루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I. 대회의 역사적 배경

1.1 역대 선교사대회의 특징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개최되기 전 간헐적으로 선교사대회가 여러 지역에서 열렸지만 세계적인 대회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최초의 선교사대회는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가 1854년 뉴욕 대회를 개최한 것인데 8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 대회는 이후 16년 동안 북미(미국과 캐나다) 해외선교회 연차 선교사대회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1860년에는 리버풀 대회가, 1888년에는 런던 대회가 열리다가 1900년에는 좀 더 큰 규모의 선교사대회가 뉴욕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에큐메니칼 선교사대회”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3천명의 대의원이 참석하였고, 250개 이상의 선교단체가 동참하여 역대 최고의 선교대회로 치려졌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교회가 선교사역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인지 교육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다보니 미국인들로 하여금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사실 1900년 뉴욕대회가 큰 대회로 치러졌지만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다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는 큰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2년 후인 1902년 인도 마드라스에서 10주년 선교대회와 1907년 상해에서 중국선교 100주년 대회가 열렸는데 이 두 대회는 선교지의 현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자문해 주는 정도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범세계적인 대회는 되지 못했다.

1.2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개최 배경
1900년 뉴욕대회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06년 초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 리빙스톤 선교회의 명예 사무총장인 페어리 댈리(Fairley Daly) 목사가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국 해외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는 대회를 하나로 묶어 선교사대회를 열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확답을 받았다. 그래서 1910년 최초로 세계선교사대회를 미국 해외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개최하기로 하고 첫 모임을 1906년 11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Glasgow)에서 가졌다. 1907년 6월 12일에 37개의 선교단체가 동참할 것을 표시하였고, 이때 실행위원회가 구성되어 두 명을 먼저 임명하였는데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의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재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과 스코틀랜드교회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완(A. B. Wann)이었다. 이후 모임에서 실행위원회가 좀 더 구체적으로 보강되어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착실하게 준비하였다.

1.3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가치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실행위원회에서는 뉴욕대회의 ‘선교동원’ 차원처럼 참석자들로 하여금 선교사역에 관심을 갖게 하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일치를 모았고, 자신들의 목적은 선교사리더 중심의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선교지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토론하는 모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청받은 선교단체는 주로 영국, 미국과 유럽대륙, 그리고 기타 단체들인데 자신들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대회가 아니라 대회의 목적은 비기독교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한정짓고 세 가지 의미가 충족되기를 바랬다: (1) 교회로 하여금 모든 나라에 복음전하는 일에 헌신토록 눈을 뜨게 하는 것; (2) 이러한 과업에 크리스천들이 연합의 정신으로 참여하는 것; (3) 선교사대회가 교회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새롭게 하나님을 발견토록 하는 것. 그래서 선교전략지도 인도, 극동지역(한국, 중국, 일본, 몽골 등), 이슬람권으로 제한하고 이들 지역의 선교사들로부터 선교보고를 받고 함께 토론하여 복음의 접촉점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종전의 선교사대회와는 달리 에딘버러대회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교단을 초월하여 서로 연합하였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회를 준비하였다. 사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윌리암 케리가 더 이상 경쟁하지 말고 함께 연합해야 상생할 수 있음을 깨닫고, 초교파적인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18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Cape Town)에서 열기로 제의한지 꼭 100년 만에 이루어졌다. ‘경쟁’ 선교를 뛰어넘어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세계최초의 선교사대회가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것이다.

2. 대회의 주제

2.1.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주제는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다. 선교의 긴박성과 참여를 촉구하는 이 주제는 원래 학생자원선교운동의 구호였다. 1886년 무디의 헐몬산 학생대회 때 로버트 윌더(Robert P. Wilder) 선교사가 100명의 학생들에게 자발적으로 선교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것이 학생자원선교운동을 태동시켰고, 이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존 모트였다. 모트는 젊은 대학시절부터 조직력과 리더십이 탁월해 1888년에는 학생자원선교운동의 의장이 되어 대학생들의 선교동원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생자원선교운동의 놀라운 결실이라면 자신들의 구호처럼 1890년부터 1940년까지 개신교 선교의 꽃을 피우게 하였고, 그 예가 1939년까지 약 2만 5천 명의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헌신케 하였다. 스테반 니일(Stephen Neil) 박사는「기독교 세계선교 사전」(Concise Dictiona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에서 학생자원선교운동이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이끄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모트는 또한 세계기독학생연합(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WSCF)과 YMCA 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를 누비며 젊은이들의 선교동참에 불을 지폈다. 이처럼 모트는 일생을 ‘학생 복음전도자’로서 삶을 바치다보니 자연스럽게 세계복음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 때 기독교 세계 교회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공식 메시지에서 모트의 세계복음화에 관한 강한 열정을 엿 볼 수 있다:
우리는 세계 복음화를 우리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큰 신뢰와 전능하신 힘에 대한 응답으로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부탁은 우리 선교사들이나 선교단체나 또는 이 대회의 우리 회원들에게만 위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 기독교인 가정, 나아가서 교회의 모든 회원들 에게 의무로 지워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기초적인 덕목들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위임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2.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는 전천년주의 종말론 신앙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전천년주의 종말론이란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환란전 휴거, 문자영감설을 믿고 세계복음화의 절박성을 지닌 자들이었다. 이 사상에 빠진 서구 선교사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의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의 말씀을 실현하는데 앞장서게 하였고, 당시 제국주의 선교도 한 몫을 감당하였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의장인 모트는 학생자원선교운동 출신으로 전천년주의 신앙의 핵심이었고, 그의 정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사실 19세기 말경 학생자원선교운동, 무디부흥운동, 나이아가라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 NBC)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대다수가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을 지니고 있어서 오지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상당한 열정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날 창의적접근지역(Creative Access Nations, CAN)과 같은 위험하거나 열악한 지역에서 선교하는 자들이 많았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여한 1,200명의 대의원 가운데 선교단체 출신 선교사들은 대다수가 비기독교국가에서 사역하는 자들이었는데 요즈음으로 말하면 World A 지역 선교사들이었다. 이 사실을 제1주제인 ‘비기독교세계를 위한 복음전달 위원회’에서 보고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주제 위원회가 지정한 비기독교국가는 일본, 대만, 한국, 중국, 태국, 말레이시아, 화란령 동인도, 필리핀, 호주 및 오세아니아, 인도, 스리랑카, 동부 지중해연안,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였는데 당시 에딘버러대회에 참석한 선교사들이 이곳 출신들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 대표로 참석한 모펫과 게일 선교사는 전천년주의 사상으로 꽉 차 있었다.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이 묻어있는 100만인 구령운동(1909-1910)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달된 지 불과 25년 밖에 안 된 나라가 전체 인구 960만 명 가운데 100만 명 구령운동을 추진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100만 명 구령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전천년주의 종말론 사상은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에 박차를 가하는데 일조를 담당하였다.

3. 대회의 준비 및 운영

3.1. 준비 과정 및 8개 주제위원회
1910년 에딘버러 세게선교사대회를 준비하는 대의원들은 전혀 새로운 대회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02년 인도 마드라스 10주년 선교대회와 1907년 상해의 중국선교 100주년 대회와 1908년 옥스퍼드 국제회의에서의 경험은 에딘버러대회를 충분히 잘 치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에딘버러 실행위원회는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계획을 짜면서 불필요한 것들은 없애고 명쾌한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탁월하였다. 이들은 2년 동안 철저히 준비하면서 8개의 주제를 선택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각 위원회는 20명으로 제한하여 전체 160명을 구성하였는데 모두가 미국, 영국, 대륙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에딘버러대회는 백인 선교사대회라 할 수 있다. 제1위원회는 ‘비기독교세계를 위한 복음전달 위원회’로 존 모트가 의장을 맡았다. 위원회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의 편집장인 마샬 브룸홀(Marshall Broomhall)과 진젠돌프 백작이 설립한 헤른후트(Herrnhut)의 라 트로베(La Trobe) 주교였다. 제2위원회는 ‘선교지 교회 위원회’로 35년간 중국 선교경험이 있는 깁슨(Gibson) 박사가 의장을 맡았는데 그는 베테랑 선교사로 선교지 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을 경험하였기에 분과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제3위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육 관계 위원회’로 고어(Gore) 박사가 의장이었다. 그는 지적인 추구가 대단한 플라톤주의자로 본국에서 선교사의 종교교육에 커다란 열정을 지닌 자였다. 부위원장은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워드 무어(Edward C. Moore) 박사가 맡았다. 제4위원회는 ‘타종교에 대한 선교사 메시지 위원회’로 의장은 스코틀랜드 에버딘의 연합자유교회대학의 케언즈(Cairns) 교수가 맡았다. 제4위원회 가운데 특별한 사람은 서든침례신학교의 4대 총장인 멀린스(E. Y. Mullens) 박사였다. 제5위원회는 ‘선교사 준비 위원회’로 핫포드 신학교 총장인 멕킨지(W. Douglas Mackenzie) 박사가 의장을 맡았고, 제6위원회는 ‘선교단체의 국내본부 위원회’로 의장은 바튼(James L. Barton) 박사인데 여성들도 두 사람이나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7위원회는 ‘선교와 정부와의 관계 위원회’로 버레이의 발포(Balfour of Burleigh)가 의장을, 제8위원회는 ‘연합과 일치 추진 위원회’로 프레이저(Andrew Fraser)가 의장을 맡았는데 그는 인도인으로서 인도의 정치와 행정권 내에서 학문을 하였기에 연합과 일치의 원칙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제8위원회에는 당시 저명한 독일 할레 대학교의 바르넥(Warneck) 교수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질의서는 각 대의원들에게 대회가 열리기 1년 4개월 전에 전달되었는데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하였다: (1) 먼 지역의 대의원들까지 정확하게 질의서를 전달하는 것; (2) 교리적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 (3) 선교사의 생활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나 열병과 같은 스트레스를 대처해 나가는 것; (4) 질의서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적어도 대회 두 달 전까지 자료를 발송하는 것. 이처럼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치밀하게 준비되어 8개 주제위원회와 8명의 위원장 그리고 1,200명의 대의원들이 대거 참석하여 범세계적인 대회로 개최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3.2. 대회 장소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세계의 국가들과 백성들에게 아덴(Athens) 이상으로 영적인 파워를 형성하는데 가장 지대한 역할을 한 대회였다”고 한다. 이 대회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뉴칼리지 연합자유교회 대회의장인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에서 열렸고, 이곳에서의 모든 모임은 존 모트가 의장을 맡아 진행하였다. 반면에 선교와 관련된 본국 사역자, 즉 목사, 평신도, 사역자, 여성선교사역 전문가, 청소년사역 전문가들을 위한 특별모임은 대회장에서 약간 떨어진 다른 회의장소인 시나드 홀(Synod Hall)에서 열렸다. 시나드 홀의 모임은 대회의장보다 하루 늦은 6월 15일에 시작해서 어셈블리 홈과 같은 날 23일에 마쳤는데 시나드 홀에서 논의된 주요 주제 10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 중국, 인도 선교의 장벽; (2) 이슬람의 장벽과 아프리카와 비기독교 세계의 장벽; (3) 그룹토의-사역자, 평신도, 여성사역자; (4) 그룹토의-유대인 선교, 어린이 사역; (5) 그룹토의-성서공회와 문서사역, 어린이 선교훈련 사역; (6) 초기선교역사 교육-1세기 기독교 확장, 대영제국의 선교; (7) 민족 문제와 관련된 선교-현대세계의 연합의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의 연합; (8) 남성모임-현대과학과 선교, 상업과 선교; (9) 여성모임-여성이 선교사역에 미친 공헌; (10) 교회의 선교.

3.3. 개회식
개회식은 1910년 6월 14일(화) 저녁에 대회의장인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곳은 교회가 서있고,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기에 의미가 더욱 깊은 곳이었다. 대회장인 버레이의 발포가 홀에 들어서자 세 명의 연설자들도 함께 뒤 따랐다. 대회장은 “신사여러분, 저는 위대하신 왕으로부터 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의심할 바 없이 위엄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선포하자 대회는 시작되었다. 대회장이 왕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왕께서는 저로 하여금 오늘 에딘버러에서 열리는 세계선교사대회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 .” 왕의 메시지가 전달 된 이후에 세 명의 연설자, 즉 대회장, 캔터베리의 대주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가 연설을 하였는데 대회장인 버레이의 발포는 선교사대회 기간 동안 무엇보다도 일치(unity)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더욱이 개회식 때 특별한 사항이라면 독일 식민성(植民省)이 에딘버러대회에 보낸 메시지이고, 그 다음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에딘버러대회 의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역시 일치를 촉구하였다: “기독교 사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크리스천간의 연합 정신은 교리의 차이점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의 차이점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교리의 차이점이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곧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3.4. 주요 대의원 및 한국선교 보고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2년의 준비 끝에 1,200명의 대의원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석하였다. 이들은 대게 해외 선교사들이나 국내 선교 행정가들인데 대게는 전문가들이지만 몇몇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들도 있었다. 에딘버러 대회에는 그리스 정교회나 로마교회 대표자들은 참석지 못하였다. 특별히 대륙 대의원들은 탁월한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독일과 모라비안 형제회와 그 외 화란,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벨기에에서 많이 왔다. 참석자들 가운데 유명한 학자들도 있었는데 독일 할레대학교의 바르넥 교수는 몸이 너무 쇠약해서 대회에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대의원들에게 중요한 글을 써서 에딘버러 대회의 중요성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 외 선교역사학자로 유명한 쥴리우스 리히터(Julius Richter) 박사와 독일 베를린 해외선교회의 선교상담전문가인 베르너(Berner) 박사도 있었다. 더욱이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에는 남성 못지않게 여성 대표들도 참석하여 각 위원회에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한국대표로는 15명이 참석했는데 제1위원회의 ‘비기독교세계를 위한 복음전달 위원회’는 한국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먼저 한국교회의 성장을 소개하였다. 당시 한국은 960만 명의 인구가운데 20만 명의 성도로 급성장하였다. 개신교가 소개된 지 불과 25년 만에 2.1%의 성도를 차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은 한국에서의 주요 사역을 보고하였는데 초기한국교회에는 해외의 8개 교단이 선교활동을 하였고, 307명의 선교사와 23개의 선교부가 있었다. 평양장대현교회의 경우 16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가 2,500명이나 되고, 수요기도회에만 1,100명이 참석하였다. 특히 한국교회가 헌금하는 일에 열정적이어서 연간 2만 5천 파운드가 넘는 액수를 헌금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가장 적은 동전 한 닢은 영국 페니의 1/4 가치라고 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 성도들은 또한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신의 소를 파는 자도 있었고, 자기 집을 저당 잡아 융자금을 받은 뒤 이 융자금을 교회 짓는데 드리는 자도 있었다.
윤치호와 사무엘 모펫은 대회의장에서 열린 토론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보고하였다. 윤치호는 한국은 이제 “위대한 추수의 때”가 도래하였다며 25년 전에는 단 한 명의 선교사와 한 명의 크리스천도 없었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수고와 땀으로 20만 명의 성도로 성장하였고, 책 가운데는 성경이 가장 많이 읽혀지는데 영국성서공회가 이에 큰 수고를 하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모펫 선교사는 한국인의 ‘자립선교’를 극찬하며 한국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외국의 돈이 투자되지 않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저력은 인도, 중국, 만주 선교와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하였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우리 선교사에게 와서 “여러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부담감을 주었지만, 초기에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달라는 요구에 여러분들이 반응해 주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우리는 “한국에서 해외선교회가 현지인 지도자를 돕기 위해 돈을 쏟아 붓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한국교회의 자립선교를 널리 알려 화제가 되었다.

3.5. 진행 방법
에딘버러 대회는 10일 동안 진행되는 동안에 오전과 오후에는 8개 위원회가 보고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고, 저녁 모임에는 토론은 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선교에 주요한 이슈들을 듣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에는 약 25분간의 예배가 진행되었고, 5분간의 짧은 광고가 있은 뒤 곧 바로 발표로 들어갔다. 발표시간은 치밀하게 짜져 있어서 누구도 예외 없이 ‘7분 발표’ 시간을 엄수해야만 했다. 각 발표자가 6분을 경과할 시에는 벨을 울려 마침시간을 알려 주었고, “벨을 울려라!”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 나와 회의장에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존 모트는 탁월한 사회자로서 할 말만 하고 논쟁에 끼어들지도 않았으며 각 보고를 잘 할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그래서 그의 인품과 영향력은 대회 전체를 은혜롭게 진행하였다: “존 모트는 침착하고 신중하여서 마지막 시간에 대의원들에게 간결하게 끝맺는 말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그의 부드러움은 회의장에 흘려 나와 대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자신을 잘 관리하는 자였다.” 한편 대회 사무총장인 올드햄(J. H. Oldham)은 존 모트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입술을 다물고 공식적인 말만 하였다. 군더더기 없는 대회 진행은 참가자들로 하여금 큰 박수를 자아내어 좋은 인상을 심겨 주었고 에딘버러대회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4. 대회의 평가

4.1. 긍정적인 측면
첫째로 선교전략지를 탁월하게 선택하여 협조를 이끌어냈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교수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3R’(right time, right person, right place)을 언급하면서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선교 집중지역으로 인도, 극동지역(한국, 중국, 일본, 몽골), 이슬람권을 선택했는데 존 모트의 풍부한 세계여행 경험은 어느 곳이 선교 집중지역인 줄 알았고, 선교단체로 하여금 이곳에 집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인도만 하더라도 당시 최대의 선교전략지여서 푼잡 출신의 스튜어트(Robert Stewart) 박사는 인도에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경대학교의 중국어 교수인 창(T. Y. Chang) 박사는 중국의 변화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중국인의 마음은 이제 텅 비워 있어서 그리스도가 자리 잡을 때가 왔다. 4, 5년만 기다린다면 아니 3년 정도면 중국이 변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로인해 중국인의 마음은 활짝 열릴 것이다. 5년이 지나면 너무 늦다! 일본의 경우를 보아 알듯이 너무 늦지 않도록 서둘러라. 이제 시작하라.” 당시 중국내지선교회의 영향을 받은 501명의 젊은 중국인들이 중국 복음화에 헌신 한 것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제1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인은 동방의 모라비안”이라 극찬을 하였다. 윤치호는 한국은 점차 기독교화 되어가고 있으며, 한국에서 너무 성급한 회심은 덕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화가 된다고 보고하였다. 만주 선교사로 활동하던 로스(Ross) 박사는 한국교회의 자립선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간증하기도 하였다. 선교 전략지에 속한 한국이 짧은 선교역사 속에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 기간 중 모든 대의원들에게 각인시켜 준 것이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한국, 중국, 인도와 같은 선교 전략지에 선교사들을 집중적으로 파송하기 위해서는 본국 교회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본국 교회가] 이 역할을 못한다면 우리의 과업은 소망이 없다.” 또한 비기독교세계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크리스천의 일치(unity)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여 ‘경쟁’ 위주의 선교 틀에서 벗어나 함께 ‘상생’하는 선교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두 번째는 연합과 일치의 추진을 극대화시켰다.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의 가장 큰 목적 중에 하나는 모든 교회가 선교사역에 일치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합과 일치는 제8위원회의 주제로 다루어졌고, 대회 한 달 전에「월간회보」(Monthly News Sheet)에도 특집으로 실렸다. 그렇다면 에딘버러 대회가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존 모트는 10가지 영역에서 연합을 제안하였다: (1) 선교자문위원회구성; (2) 강력한 선교지분할정책; (3) 학교교육평가; (4) 연합대학설립; (5) 협력의료선교; (6) 선교신문; (7) 선교잡지; (8) 찬송가; (9) 사상교류; (10) 교회연합위원회구성.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연합과 일치의 좋은 예로 한국을 소개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이 서울에 대학을 설립할 때에 교단별로 경쟁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대학을 세워 사역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일치가 필요함을 한커우(Hankow) 주교가 보고하였다: “우리는 중국 크리스천들 사이에 리더십을 상실하고 있다. . .중국인들이 더욱 국가주의자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이들은 중국을 위해 하나의 교회를 더욱 요구할 것이다.” 존 모트는 연합의 범위를 사역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교단까지 확대하여 성공회, 장로회, 회중교도, 침례교, 감리교처럼 교단을 따지지 않았고 교파별 연합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에딘버러 대회는 교단을 뛰어넘어 타종교와의 연합도 강조하였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와도 연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기억할 것은 이들은 계급제도의 바티칸이 아니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매우 헌신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연합과 일치 추진 위원회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후 모임에서 이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세 번째로 선교사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선교사 준비 위원회의 의장인 더글라스 멕킨지(W. Douglas Mackenzie) 박사는 에딘버러 대회가 열리기 1년 6개월 전부터 모임을 가지면서 보고서를 준비하였는데 그는 세 가지 방향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 각 선교단체로 하여금 언어훈련과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을 다루도록 안내할 것; (2) 선교사 모집을 할 때 목사, 전도자, 교육가, 의사, 비즈니스 선교사처럼 다양하게 할 것; (3) 선교지를 다양하게 하지 말고 선교집중지역을 선택하여 선교사를 파송할 것. 선교사 준비 위원회는 각 선교단체의 선교사 허입위원회, 선교훈련원, 신학대학, 신학교, 성경학교, 다른 기관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위의 세 가지 사항을 인지하고 협조하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 20세기 초반에는 학생들의 선교동원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선교사 준비위원회는 제5위원회로 소속되어 선교사 자질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모든 것은 파송 받는 선교사의 자질에 달려 있습니다. 이 자질은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단순히 영적인 것만 아니라 신체적인 것입니다. 단순히 신체적인 것만 아니라 도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선교사의 자질 다섯 가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첫째는 타종교를 연구하여야 하고, 둘째는 선교역사에 대한 지식이 충만하여야 하고, 셋째는 사회학을 알아야 하고, 넷째는 가르치는 기술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현지 언어를 공부하고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식민지 팽창주의 시대에 자문화우월주의(ethnocentrism)에만 빠지지 않고 현지언어습득을 강조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별히 보고서에는 언어습득훈련을 잘하는 선교단체로 중국내지선교회(CIM)를 소개하였고, 또한 아랍언어훈련을 잘하는 훈련센터가 카이로에 있으며, 인도, 중국, 일본어훈련센터도 동일하게 선교지에 있음을 보고하였다. 일반적으로 “현지어는 혈관(血管)과 같다”고 하였는데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참석한 대의원들에게 이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네 번째는 국내 본부 사역을 잘하도록 인도하였다. “선교훈련은 올바른 선교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선교사훈련이 중요하다는 예기다. 에딘버러 대회는 국내본부사역 위원회 의장으로 터키에서 18년간 선교활동을 하였고, 미국해외선교위원회 해외국장인 바튼(Barton) 박사를 임명하였다. 바튼 박사는 미국에서 탁월한 선교훈련가 중의 한 명으로 선교단체들로 하여금 선교사 훈련을 할 때에 다음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첫째는 현지인교회를 자립하게 하는 것, 둘째는 교육선교의 효과를 높이는 것, 셋째는 의료선교를 잘 감당하는 것, 넷째는 산업선교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국내본부사역 위원회는 선교단체의 운영을 효율적으로 하도록 안내하는 것과 선교사훈련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이 위원회는 선교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들이 위원회에 선정되어 바람직한 선교사훈련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토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국내본부사역 위원회에서는 ‘모라비안 이상’(Moravian Ideal)을 만들어 지역교회와 신학대학에서 정착되기를 소망했다. 이곳에서 모라비안 이상이 뿌리를 내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선교사로 헌신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였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평신도들이 전면전에 나서서 선교사역을 도와야만 한다. 요청하건데 에딘버러 대회의 실제적인 결과물의 하나로 유럽에서 여러 국가들의 평신도들이 함께 연합하는 것이 연구되어진다면 이 운동은 유럽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처럼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젊은이들과 평신도들을 선교동원 시키는데 국내본부사역 위원회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선교와 정부 간의 관계형성을 주제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사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가 열릴 당시의 선교는 지금보다는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는 오늘날에 비해 선교사 추방이나 박해가 적기 때문이다. 당시 선교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던 나라는 네팔, 부탄, 아프가니스탄 정도였고, 중국은 기독교에 점차 우호적인 나라 중 하나로 바뀌었다. 초기기독교선교역사를 보아 알듯이 선교와 정부가 적절한 관계 맺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부라 함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 데 하나는 선교사 자신이 소속된 정부를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선교지의 정부를 말한다. 선교사는 이 두 개의 정부와 긴밀한 관계 형성을 해야만 한다. 관계 형성이라는 것은 법을 지킨다는 말이다. 오늘날 역시 이 두 관계를 무시하고 선교사역에 몰입 한다면 ‘열정’은 있으되 ‘지혜’가 부족한 선교로 전락(轉落)할 것이다.

4.2. 수정·보완해야 할 측면
첫째로 교회개척에 관한 발표를 통해 선교사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전략을 평가하고 새롭게 제안하는 논의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릴 당시 서구 선교사들은 전통적인 선교기지(mission station)식 교회개척을 선호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길목이 좋은 곳에 땅을 구입하여 자신들의 사역에 필요한 교회, 병원, 약국, 학교 등을 세워 활동해 나가는 것을 선교기지라 말한다. 선교기지의 장점은 현지인들을 쉽게 모을 수 있고, 사역을 용이하게 할 수 있지만 현지인을 세우는 데는 목적을 두지 않는다. 식민주의 선교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취약점을 극복하여 현지인 스스로 자립, 자치, 자전하는 ‘3자 원리’로 교회개척 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 헨리 벤(Henry Venn)이었고, 당시 ‘3자 원리’식 교회개척은 서구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때 8개 위원회가운데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는가? 그렇지 않다. 사실 제2위원회의 ‘현지인 교회와 사역자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자립, 자치, 자전을 강조하기는 하였다. 예를 들어 제2위원회에서는 한국교회의 자립과 자전하는 능력을 잠깐 소개하여 한국인의 탁월한 교회개척을 각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선교기지식 교회개척에서 왜 자립에 실패하였는지, 왜 성공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토론하지는 않았다. 연구자는 자립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적’ 자립과 함께 ‘재정적’ 자립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서구 선교사들은 교육을 통해 현지인들에게 신앙적 자립을 강조하였지만 재정적 자립에는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개척도 마찬가지이다. 빈곤 지역이나 의존성이 높은 나라에서 신앙적,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갖춘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무척 힘들다. 선교훈련가는 선교사를 훈련시킬 때 ‘복음전도자’ 수준의 선교사를 길러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교회개척’ 수준의 선교사를 배출해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에딘버러 대회는 선교사 동원과 파송을 강조한 것에 비해 안식년 선교사나 베테랑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교회개척 사역을 돌아보고 무엇이 잘되고,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 주는 위원회 활동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이것은 서구 선교사들의 계몽주의적 사고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로 현지인 지도자 양성과 위임에 관한 구체적인 제안이 없어서 아쉽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 존 모트는 세계복음화의 주역이 점차 서구교회가 아닌 현지인교회가 될 것이라는 그의 판단은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더 강력하게 세계복음화를 바라야 하는 것은 세계복음화가 단지 유럽인과 미국인의 사역 만이 아니라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사역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지인 교회들이 전도와 선교의 정신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여 주는 전 세계의 보고를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소 망과 확신을 갖게 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 편에서 자기 부정적 선교 활동과 적극적 인 전도를 위한 주도적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반드시 계속해야만 한다. 이 로써 잘 훈련된 현지 전도자들과 지도자들의 선교군단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존 모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현지 지도자들이 많이 일어나 이들이 훗날 세계복음화의 주역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래서 그는 에딘버러 대회에서 비기독교세계에 선교를 촉진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 주제위원회에서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고 위임하는 부분들이 상세히 다루어 지지 못한 점이다. 주제위원회의 의장 중에는 선교지 경험이 10년차, 20년차, 심지어 30년차가 넘는 사람도 있어서 현지인 위임 과정에서 겪던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다루어 지지 못하였다. 식민주의 선교시대에 선교사 상(象)이라고 하면 전형적으로 부모(parents)단계이다. 소위 선교사의 역할 가운데 1단계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2단계인 갈등단계와 3단계인 위임단계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취약점이다. 선교사 리더십의 꽃은 위임인데 아직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에서는 이것까지 다루지는 못했다.
셋째로 ‘보여서’(showing) 제자 삼는 훈련을 강조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선교사는 선생이 되지 말고 멘토가 되어라”는 말이 있다. 선교사는 그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삶과 인격으로 현지인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의 말씀처럼 ‘가르치는’ 것보다 ‘지키게’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한다. 즉, 선교사는 ‘가르쳐서’(teaching) 변화시키기 보다는 ‘보여서’(showing) 일꾼 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때 제3분과의 교육위원회에서는 교육선교에 중점을 두었고 다섯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다: (1) 미션스쿨과 정부의 교육시스템과의 관계; (2) 미션스쿨에서의 현지어 교육; (3) 여성과 소녀들을 위한 교육; (4) 농업을 포함한 산업교육; (5) 기독교 문서 제공. 교육선교가 비기독교세계에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취약점이 있음을 존 모트는 알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고급 시스템의 근대식 교육의 위험성이라고 한다면 너무 학문적으로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도덕적 회의론에 빠질 수 있다.” 연구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릴 당시 서구 선교사들은 ‘BE’ 보다는 ‘KNOW’에 중점을 둔 교육을 하였다. 바라기는 ‘BE’와 ‘KNOW’와 ‘DO’가 함께 연합하는 ‘수레바퀴이론’이 강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포괄적 교리를 수용하는 결함을 지니게 되어 아쉽다. 사실 에딘버러대회는 선교의 지나친 경쟁과 중복을 막기 위해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초교파적인 모임이었다. 다양한 교단적 배경을 지닌 선교사들과 선교전문가들이 함께 모인 뜻 깊은 자리에서 이들의 주 관심은 오로지 일치에 있다 보니 대회가 마칠 즈음에 어떤 교리적 요소가 담긴 선언문 채택을 하지 않고 다만 기독교 세계교회의 회원들에게, 비기독교 세계교회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두 개의 메시지를 채택하는 것으로 대회를 종결지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는 줄곧 ‘교파’간의 일치를 강조하였고, 나아가 ‘종교’간의 일치도 강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연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에딘버러대회는 ‘에큐메니칼 선교사대회’의 성격을 지녔고, 이후의 선교사대회는 로마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와의 연합과 일치까지 확대하는 모임으로 전개되어 에딘버러대회는 훗날 에큐메니칼(Ecumenical) 그룹과 복음주의(Evangelical) 그룹으로 나눠지게 하는 불씨를 초래하고 말았다.

나가는 말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How Mission’ 대회라 할 수 있다. 세계복음화를 성취하기 위한 8개 주제위원회를 구성해 ‘교회가 어떻게 선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를 찾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존 모트와 1,200명의 대의원들이 내린 결론은 연합(cooperation)과 일치(unity)였다.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함께 연합할 때 상생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에딘버러 대회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강력하게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함께하는’(with) 선교를 하라!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 강대국이 되었지만 우리의 아킬레스건은 여전히 연합과 팀웍이다. 한국선교사의 중도탈락율 첫 번째가 동료선교사와의 갈등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외부와의 연합보다 자체 팀웍조차도 힘든 것이 한국선교의 현 주소이다. 사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연합과 일치를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어 타종교와도 시도하면서 훗날 ‘확대전도’(Larger Evangelism)까지 확장되는 선교로 변질되었지만, 한편으로 복음주의자들에게 세상의 아픔과 상처에 눈을 뜨게 하였고, 연합의 힘을 알게 해 준 귀한 대회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함께하는’ 선교를 감당할 것인지 고민하며 과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존 모트는 앞으로 선교지교회가 선교주도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 선교의 축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가 선교동원과 선교사파송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 향후 40-50년간 선교에 빨간불보다는 파란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이다. 205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GNP)이 8만 불까지 지속적인 고도성장, 2050년까지 한국이 영국과 같은 복합민족국가와 같은 다문화사회 형성, 시니어선교사의 확대, 신학생의 수요증가, MK들의 헌신자 증가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가 유렵교회처럼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는데 함께 한다면 선교의 촛대는 계속 한국에 머물 것이다. 1세대 선교사들에게 “나는 베드로가 되고 당신은 바울이 되라”는 말이 있다. 비록 자신은 베드로처럼 현지 언어에 능숙치는 못하지만 1세대만이 갖는 열정과 희생정신을 1.5세대와 2세대인 바울 같은 MK들에게 보여주어 훗날 이들이 전 세계에 복음전하는 역군으로 길러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에딘버러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존 모트와 같은 2세대 인재를 길러내라! 마음이 열려있고, 세상의 흐름과 방향을 관통하는 안목이 있고, 탁월한 리더십과 타문화와 세계관을 꽤 뚫어보아 복음적이며 효과적으로 선교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일꾼들을 길러낸다면 한국선교는 분명 희망이 있을 것이다.


주제어(Key Words)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존 모트,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 연합과 일치,
에큐메니칼 선교사대회, 윤치호, 사무엘 모펫
1910 Edinburgh World Missionary Conference, John Mott,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Cooperation and Unity, 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T. H. Yun, Samuel A. Moff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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