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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기행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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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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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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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ad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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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8일의 네팔 단기선교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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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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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네팔로 해외단기 선교 여행을 간다고 하여 부모님, 동생과 함께 7박8일의 일정으로 네팔을 다녀왔다.
네팔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북쪽으로 중국 티벳과 인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에는 부탄과 접경하고 있는 내륙국으로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2006년까지 왕이 통치하였고 나라의 공식 국명이 네팔 왕국이었다.
2007년 1월 15일 왕정이 종식되고 2008년 5월 228일 네팔 연방 민주공화국이 되었으며 2010년 현재 가장 최근 민주공화국이 된 나라로 현재 수상이 통치 중임. 2006년까지 복음 전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으나 2007년부터 복음 전하는 것이 자유로워 졌으며 계속해서 교회가 늘어가고 있다.
* 네팔의 일반적 현황
인구 : 4,000만명
수도 : 카트만두, 문맹율 : 60%
면적 : 한반도의 2/3크기
종족 : 약 75개 인도출신 아리안계와 히말라야 산지의 몽골 족
종교 : 힌두교(90%), 티벳불교(7%), 이슬람(2%), 기독교(1%)
시차 : 한국보다 3시간 15분 늦음
화폐 : 루피(1USD=74루피)
* 7박8일의 주요 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날 : 카트만두 도착, 현지교회 방문 및 노방전도.
둘째 날 : 여름 성경학교
셋째 날 : 한인교회 예배, 여름 성경학교
넷째 날 : 다일공동체 밥퍼(밥 나누어 주기), 어린이 사역
다섯째 날 : 포카라로 이동
여섯째 날 : 트래킹 및 노방전도, 포카라 고아원 사역
일곱째 날 : 카트만두로 이동, 선교사님들과 식사
여덟째 날 : 카트만두 시내 투어, 한국도착.
첫째 날(7월9일 금요일)
비행기를 타고 6시간이 지나서야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하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환경이 좋지 않았다. 공기도 좋지 않고 신호등이 수도에 12개 밖에 없어서 교통이 혼잡해 자동차, 오토바이 등 경적소리도 많이 나 시끄러웠다. 우리는 호텔에서 여정을 풀고 다시 내려와 현지교회를 둘러보고 노방전도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낯설고 쑥스러웠지만 어른들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친절하게 우리의 전도에 응해 주어 갈수록 힘이 났다. 대부분 힌두교를 믿어 이방인에 대해 거부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 이었다. 특히 전도를 하는데 아이들이 모두 나온다고 하여 기뻤다. 다음날 많은 아이들이 여름성경학교에 올 것을 기대하며 호텔에 가서 잠을 잤다.
둘째 날(7월10일 토요일)
우리는 아침에 현지교회로 갔다, 9시부터 시작이었는데 벌써부터 교회 앞에 우리를 기다리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사전에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오늘 어린아이들을 위해 보여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특히 내 동생은 학교와 집에서 틈틈이 익힌 마술을 준비해 왔고 나는 약 5분간의 우리 전통무술인 택견 시범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먼저 우리는 찢어지고 냄새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온 모든 아이들에게 준비해 온 노란티셔츠를 갈아입히고 얼굴에 예쁜 스티커를 붙여 주고, 한 사람씩 사진도 찍어주고 과자와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이 20여명인데 성경학교에 많게는 50명 정도가 나올 것이라고 선교사님이 예상 하셨는데 뜻밖에도 약 120명의 아이들이 와서 우리 모두 놀랐다. 준비된 대로 아이들과 전도 팔찌도 만들고, 악기도 연주하고, 춤도 추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오후에 시작된 동생의 마술시범과 나의 택견 시범은 아이들이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한국의 전통무술을 이국땅인 네팔 땅에 소개하게 되어 내 딴에는 내심 자랑스러웠다. 오늘의 어린이 사역을 모두 마치고 현지 고아원을 잠시 방문하여 둘러보고 거기서 현지식(일종의 카레)으로 점심을 먹었다.
셋째 날(7월11일 일요일)
아침에 카트만두 한인교회에 갔는데 그곳에는 네팔에 소명을 가지고 100여명의 선교사님들이 모여 한인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보았다. 우리 일행은 특송을 불렀고 많은 분들이 함께 따라 불렀고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었다. 다시 여름성경학교를 하러 썩띠쌀리 교회로 갔다. 비가 옴에도 우산도 없이 먼저 아이들이 와 있었다.(부자들만 우산을 가지고 다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를 맞고 다닌다) 학교 시험기간 임에도 어제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왔다. 어제 찍었던 사진을 밤새 현상해 아이들과 함께 액자를 만들었는데 자신들의 사진을 보고 신기해하고 보물을 다루듯이 소중히 여겼다. 아트 풍선을 만들어 모자도 씌여주고 풍선 터트리기, 볼링 게임 여러 가지 게임을 했는데 아이들이 어찌나 즐거워하던지.....그들의 행복해하는 함박웃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도중에 예기치 않던 불행한 소식이 들려왔다.
어제도 왔던 ‘어누’ 라는 14살 여자아이가 몇몇 아이들과 같이 냇가를 건너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 실종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우리 모두 망연자실하여 그날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함께 모여 어누가 살아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도하며 하루를 보냈다.
넷째 날(7월12일 월요일)
아침 일찍 우리는 카트만두 강가 주변에 있는 빈민촌을 찾아 갔다. 하천을 따라 판자촌이 늘어서 있었고 가는 길은 진흙탕에다 아주 냄새가 심했다. 거기에 사는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번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다일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방문했다. 오늘의 사역은 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직접 밥과 반찬을 담아 나누어 주고 식기를 설거지 하는 일명 ‘밥퍼’ 사역이었다. 먼저 원장님의 밥퍼 사역을 위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250여명의 아이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서로 악수하겠다고 난리들이다. 가난 하지만 너무 천진난만한 모습들 이었다. 내가 직접 아이들을 위해 밥을 퍼주고 반찬을 담아주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잠깐의 사역이지만 뿌듯하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와 이들을 위해 좀 더 도울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째 날(7월13일 화요일)
우리는 카트만두에서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포카라로 이동하였다. 포카라는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많은 산악인과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관광 도시이다. 6시간이나 걸렸는데 네팔이 1400m 산악지대이다 보니 높은 곳에 집들이 있고 90%가 농사를 짓는데 아주 가파른 산을 빼고는 계단식 논을 만들어 자급자족을 하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구름이 내려와 산 곳곳에 걸쳐 그림 같은 장관을 이루는 반면 사람들은 우리나라 60~70년대처럼 소를 몰고 한가로이 농사짓고 있었다. 넘어가는 산길이 매우 험하고 내내 꼬불꼬불한 길이어서 심하게 멀미가 났고 매우 위험스러웠다. 복잡하고 매연이 많은 카트만두와 달리 평화롭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소박한 도시였다.
여섯째 날(7월14일 수요일)
우리는 '사랑콧‘ 이라는 곳으로 올라가서 트레킹을 하였다. 사랑콧은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해발 1590m의 전망대이다. 마차푸차레는 물고기 꼬리 모양이라 해서 Fish-Tail 이라는 별명이 있다. 트레킹은 6시간이 걸렸고, 산악인 오 은선 누나가 정복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산은 우기철 이라 구름에 가려 보지 못해 아쉬웠다.
보통은 4시간이 소요되는데 가면서 산등성 곳곳에 산재해 있는 마을주민들과 아이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느라 오래 걸렸다. 미리 준비해간 사탕과 볼펜을 나누어 주었는데 어떤 아이들은 그전에도 받은 경험이 있는지 받고도 또 달라고 졸졸 쫒아 오기도 하고 심지어 돈을 달라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였다. 곳곳에 구름이 산등성이에 걸려 있고 아래로는 계곡이 내려다 보여 경치도 아름다워 즐거운 트래킹이 되었다. 산을 내려와서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포카라의 고아원을 찾아 갔고 그 곳엔 12명이 있었다. 준비해간 티셔츠를 입히고 함께 간 미용사인 백장인 형이 머리도 잘라 주었다. 이차라는 이름을 가진 누나는 꿈이 가수이고 기타를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여 즉석에서 아빠가 기타를 사주겠다고 약속하셨다. 7년 후에 네팔에서 유명한 가수가 되어 있길 소망한다.
일곱째 날(7월15일 목요일)
아침 일찍이 다시 카트만두로 이동하였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후 우리는 한인교회로 갔다.
한인교회에 가서 카트만두에 있는 모든 선교사님들과 같이 격려와 위로의 밤을 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시는 선교사님들이 존경스러웠다. 그 분들 중엔 혼자만의 행복을 뒤로하고 평생을 오지로 다니시며 의료선교를 하신 80세 슈바이처 같은 분도 계셨고, 영어 선생님을 그만두고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네팔 어린이들을 향해 품은 목사님 부부도 계셨다. 함께 간 팀원 중에 MBC 개그맨 이셨던, 이 하원 아저씨가 식사 후에 2부 행사 사회를 맡아 선교사님들과 서로 장기 자랑을 하며 즐거운 교제시간을 가졌다. 개그맨 이셨던 분이라 그런지 아주 재미있게 사회를 보셨다. 잠시나마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기분이 좋았다.
여덟째 날(7월16일 금요일)
일정 중 실종된 어누가 발견되어 장례가 치러졌고 오전에 어누 집을 방문해 가족들을 위로해 주었다. 슬픔 중에 기쁘게도 평생 힌두교를 믿었던 어누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에 놀랍고 기뻤다. 지금 어누 어머니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한국어를 공부 한다는 것을 알고, 8월쯤 한국으로 초청할 방법을 찾고 한국을 둘러보게 할 것이라고 어른들께서 말씀 하셨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공항에 가기 전 잠시 카트만두 시내에 들러 네팔 토속품을 구경도 하고 사기도 하였다. 네팔을 떠나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새벽2시가 되었다.
이런 사역들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고 느꼈다. 카스트 제도가 있어 계급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산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에 이어 행복지수가 두 번째인 나라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밝게 웃는 네팔 아이들이 대단해 보였고, 가진 것에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주워진 환경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과 친구들에게 많이 베풀어 야겠다.
봉사와 선교를 하기 위해 북한과 함께 아시아 최대 빈민 나라 네팔 까지 오신 선교사님이 무척이나 존경스럽다. 나도 크면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행가기전 그런 곳에 왜 가야하냐고 부모님께 떼를 썼던 나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글 : 변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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