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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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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QT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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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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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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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ad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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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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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르심은 단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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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기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자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려는 꿈은 저에겐 없었습니다. 아니 하고 싶었지만, 제 안의 두려움, 누리고 살아왔던 풍요와 안정감을 버리는 그것이 저에겐 너무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생활을 하던 때까지 저는 나중에 돈을 많이 벌고 풍요롭게 살며 하나님의 일은 파트 타임으로 하기 원한다고 마음대로 제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고 제 삶의 방식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풍요속의 제 삶은 마음속의 깊은 빈곤과 공허함과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지는 이제 와서 생각해도 미스터리입니다. 저를 지으신 분께서는 얼마나 저를 잘 알고 계신지요. 그분께서 얼마나 부드럽게 다가오시어 저를 한걸음씩 인도하셨는지, 제 마음을 어쩌면 이렇게 변화 시키셨는지…… 뒤돌아보면 그분의 크심과 인자하심에 저는 다시금 탄복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하고 세상을 쫓아갔다가 하나님의 매를 맞고 돌아왔다던지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사역자라는 고행의 길을 선택했다는 얘기들을 하곤 하는데, 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부드러운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억지로 지워진 것이었다면 제 삶이 고행이었겠지만 제가 선택하고 따라온 길이었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저는 즐거웠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저에게 하신 첫번째 일은 제 마음을 깊이 치유하시며 그분의 사랑을 저에게 나타나 주신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분에게 항복 당했는데 그분의 힘과 완력에 항복 당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앞에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더 알고 나자 그분을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를 따라오겠느냐는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오래 전 스위스에서 제자훈련 학교를 하던 20대 초반 어느 때에 교실 한편에서 제 담당 간사와 또 다른 간사 한 분을 세워놓고 그분들께 증인이 되어달라며 했던 기도가 생각이 납니다. “주님, 저의 젊은 날을 당신에게 훈련 받는데 드리겠습니다.” 제 정신 멀쩡한 따사로운 봄 햇살 가운데 서서 자발적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나 저에겐 대단한 결심이요 선언이었고, 그 말을 하면서 왜 그리 북받쳐 올라오던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 몇 년간 저는 성령님의 학교에서 나름 스파르타 훈련을 받았습니다. 가진 것 없이 주님을 따랐어야 했고, 세계 여기 저기로 그분의 음성 하나만 따라서 아무런 기반도 안정감을 둘만한 것도 없는 체 다니며 성령님의 교실에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기뻤습니다. 그 교실에서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 제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법,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법, 겸손히 섬기는 법… 그분의 도를 참 많이 배웠습니다. 학교 성적을 스스로 자평해본다면 D도 못나온 불성실 학생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면 저는 아직도 배운 데로 살지 못하고 제 속에서 싸우고 갈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학교가 때로 고되고 아프고 힘겨웠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를 돌봐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용납해주시고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고 또 보상하기를 잊지 않으시는 분을 만나고 또 만났기에 기뻤습니다. 이 학교의 진정한 수확은 제가 그분이 어떤 분인지 배우게 된 것일 겁니다. 그래서 더 그분께 고삐를 단단히 잡히게 되었던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부르심은 참 단계적이었습니다. 제 DTS가 끝날 때쯤 제가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저는 그 뒤로 지금까지 집과 정착지 없이 살아왔습니다. 제 포기도 한번씩 더 깊어졌습니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엔 눈물을 흘리며 편안한 삶, 나만의 방, 프라이버시, 편한 침대, 에어컨 같은 것을 포기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또 그 뒤로 파송 받고 장기 사역자로 나갈때는 가정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었기에 많이 아팠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늘어놓으며 회상에 젖는지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12월부터 본격적인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일에 바빠서 치어 다닐 때는 저를 성찰할 필요가 많이 없어서 편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중지되자 제 내면과 만날 수 밖에 없더군요. 두려움 많은 사람, 여전히 믿음이 연약한 사람 그것이 저입니다. 당연한 권리로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은, 체력적인 한계를 맞닥뜨려서 가지는, 할 때가 훨씬 지나서 연체가 되어버린 이 안식년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왜 그리 두려웠던 지요. 저는 사실 사람이 많이 두려웠습니다. 오해 받을까봐, 신뢰를 잃을까봐, 후원이 끊어질까봐, 재정적으로 어려울까봐,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고 국내에서 여기 저기 다니며 일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날까봐 두려웠습니다. 혼자서 모든 예측과 상상을 해 놓고 ‘내가 당연히 누릴 권리인데 이럴수 있나!’ 라고 혼자서 분노도 하고, 제 앞에 펼쳐질 어려운 상황과 사람들의 오해 받을 걸 상상하며 슬퍼도 하고… 참 우습지 않습니까? 담담히 말하자면, 저는 안식년을 꼭 해야하는 상황이 맞고, 또 그 시기도 한참 지났으며, 그동안 제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용량 초과로 일했기 때문에 허약해진 정신과 육체 또한 현실이기에, 제 쉼은 게으름도 여유 부림도 아닌 꼭 해야하는 일임은 맞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맞냐 틀리냐가 아니라, 저의 두려움… 불안감이 진정한 문제였습니다. 일만 하며 바쁘게 살던 제가 새로운 상황과 도전속에서 다시금 제 아버지를 신뢰해야한다는 문제앞에 선것입니다. 그래서 1월에 출국할지 말지를 12월 말이 되도록 결정하지 못했고, 이렇게 기도편지를 늦게 보내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아, 가뜩이나 좋지 않은 소식들 많이 들으실텐데 제가 여러분에게 격려와 위로는 못드리고 제 속내.. 그것도 부끄러운 속내만 잔뜩 드러내어 죄송합니다. 예, 이 시간은 저에게도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앞서말한 고뇌의 시간에 저를 찾아온 것은 결국 ‘안정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에게 기업을 나눠주시지 않으며 하신 말씀, 그들에게는 내가 기업이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은 참으로 저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어쩌면 고정된 지역에서 기반을 가지고 목회하는 것이 아닌 저 같은 순회 사역자에게는 더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저의 결정에 대해 두려워하고 고민하면서, 또 한국에 와서 삶의 기반을 탄탄히 쌓아놓은 친구들과 사람들을 보면서 제 안의 불안감은 더 부추겨지고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부르심 안에 안정감을 가지기란 더 어려운 선택이요 도전이 됩니다. 얼마나 배은 망덕한지요.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내리신 분앞에서도 결코 그분을 안정감으로 삼고 믿음으로 나가기를 선택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저는 사실 사람들이 들으면 눈을 크게 뜨며 신기해 할만한 기적과 역사를 많이 보아온 사람인데도 이렇게 두려움이 많습니다. 아 그리고 깨닫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았기에 순종치 않았기에 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제 마음의 진정한 안식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에서 오게 될 것이요. 또 이 안식년을 어떻게 보낼지도 사실은 제 마음에서 결정 될 것이라는 것이요. 사실, 지난 한달 반은 마음이 편치 못해 몸만 안식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결심은 이것입니다. 저는 그분을 믿고 안식할 것입니다. 사실 지난해에 경제한파가 오면서 사역자인 저도 후원이 반 이상 줄어들며 실질적인 도전을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제 영혼에게 말하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성경 기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묵상하고 뒤돌아 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저같이 믿음 없고 망각하는 자들에게는요. 제 안정감의 문제와 씨름하면서,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왔는지 또 그분께서 신실하셨는지를 자꾸 회상하고 묵상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옛날 얘기로 말씀을 꺼낸 이유입니다. 사실 예전에 사역이 진행되고 일할 힘이 넘쳤을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좀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무력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는 제게 새로운 도전이라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상황은 예전의 신뢰가 100% 하나님께 대한 신뢰였는지 저를 다시금 시험합니다. 저에겐 또 다른 신뢰의 벽을 넘어서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경제 상황은 저 같은 사역자 뿐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비슷한 도전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 되시는 분, 영원하지 않은 것들 대신 영원한 것에 안정감을 두는 연습을 하기 좋은 때가 바로 이 때일 것이라는 생각이요. 제게 사역과 재정이 떨어지는 이 때가 더 큰 도전이라면, 생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도 사업과 재산이 하락하는 이 때가 도전의 때이겠지요. 그리고 결국 영원하시고 흔들리지 않는 분, 우리를 돌봐주시고 먹이고 입히시는 아버지, 장차 영원한 처소로 우리를 맞아들이시겠다고 약속하신 분께 주님께 신뢰와 안정감을 두라는 부르심은 사역자들만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결국 동일 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요셉아, 너는 아버지를 신뢰하니?” “네 주님이 너를 돌보실 것을 신뢰하니?” “네 부르심과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니?” “너의 안정감은 어디에 있니?” 여러분도 자문해 보시면 어떨까요....?
“네, 주님, 저는 자꾸 당신의 성품을 잃어버리고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제 궁극적인 안정감을 취하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회개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신뢰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신은 제게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당신은 제 신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어려운 시기가 오히려 저와 여러분에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가져다 주는 기회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기간이 지나고 더 큰 믿음과 간증을 가지고 만날 것을 기대합니다.
사랑을 담아서,
정요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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