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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 > 비거주, 순회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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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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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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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ad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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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의 머쉬쉽 사역을 잠시 접고 재충전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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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의 머쉬쉽 사역을 잠시 접고 재충전과 더 나은 선교사가 되고자 한국에서 시간을 갖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래서 이번 소식지에선는 머쉬쉽10년 사역에 대한 저 개인의 선교 발자취를 와 안식년 동안의 계획을 나누고 싶습니다. 좀 깁니다. 다 읽기 힘드시면 바로 끝으로 가셔도 좋겠습니다. ^^
제가 선교사의 길로 접어 든 해는 1998년도 입니다. 한신대 신학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어떤 분야의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던 친언니가 Mercy Ships(머쉬쉽)이란 선교단체를 소개해 주어서 선교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잡히기도 전에 이 선교단체에 참여하며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머쉬쉽(www.mercyships.org) 은 올해 사역 30주년을 맞이 한 국제 선교 단체로 처음에는 YWAM (예수 전도단)에서 시작했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독립을 하게 된 단체로 선박을 이용하여 의료 선교와 지역개발, 전도활동을 하는 선교단체 입니다. 본부는 미국 텍사스에 있고, 세계 14개 국에 지부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Mercy Ships 사무실이 답십리에 있습니다.
1998년도1월에 처음 합류했던 배는 Island Mercy 였는데, 최대 60명이 탈수 있었던 조금만 배였습니다. 남태평양의 섬들(피지, 파푸아 뉴기니, 솔로몬 아일랜드, 통가 등 ……)을 다니며 안과 사역을 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영어 실력도 좋지 않고, 한국을 처음 떠나 해외로 나온 터라 정말 ‘모르는 게 약이다’ 젊음과 용기로 지낸 일년이었습니다. 이때는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처음 하는 주방 일이라 힘든 점도 많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접하고, 경험하는 소중한 일년이었습니다.
| 터크보트의 도움을 받아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도까지의 무사한 항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50여명의 선교사들이 승선해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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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머시 사역이 끝나갈 쯤 머쉬쉽에 속한 또 다른 배 Caribbean Mercy 가 1999년에 중국을 거쳐 북한을 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무척 마음이 설렜었습니다. 기도해 본 결과 이 배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을 주셔서 신청을 하게 되어 1999년 캐리비안 머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3달 동안 한국의 여러 항구를 다니며 머쉬쉽 홍보사역을 하고 (하지만 그 때 서해 해역에서 북한 군과 대치 하는 일이 있어 북한 방문은 취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떠날 때, 배에서는 장기 선교사로 일하고 싶으면 6개월, DTS(제자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해서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이 훈련을 받기로 하고 배와 함께 한국을 떠났습니다. 캐리비안 머시는 중남미 지역에서 선교하던 배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홍보 사역을,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을 다니며 우물 파는 사역과 안과 백내장 수술 등의 선교 사역을 하는 배였습니다. 최대120명 정도 승선할 수 있는 중간크기의 배였습니다. 저는 캐리비안 머시에서 주관하는 DTS를 수료하게 되어 장기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타게 된 배는 Anastasis (아나스타시스)로 머쉬쉽에서 구입한 최초의 배로 약 350명의 선교사들이 탈 수 있는 커다란 배였습니다. 이 배는 주로 서 아프리카 지역(시에라리온, 감비아, 가나, 기니, 라이베리아, 토고, 베넹 등…) 에서 더 다양한 의료 사역과 지역 개발, 전도 활동을 하는 배였습니다. 2001년도 아나스타시스에 합류 하여, 노방 전도팀, 입원실 환자들을 대상으로 상담하고 전도하는 전도자 일을 거쳐, 지금은 에이즈 교육과 훈련을 당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나스타? 첵병?은퇴하고 작년 5월에 Africa Mercy 가 새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머쉬로 옮겼고, 현재까지 현지 교회 목회자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에이즈 교육과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머쉬쉽의 사역과 함께 선교의 장에 뛰어든 지 10년이 넘었다는 게 잘 믿어 지지 않지만 뒤돌아 보면 주님의 은혜가 늘 함께 하셨던 것을 다시금 깨 닳게 됩니다. 10년 전에는 대학원 교육까지 마친 제가 ‘Hi’ 라고 인사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사람들을 피했는데, 지금은 영어로 현지인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저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 감탄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누군가 물어보면 ‘고아원 보모’라고 대답하곤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보육원에 다니던 ‘선희’라는 친구와 무슨 이유인지 크게 싸우고 친구가 하루는 방과후 그 친구가 사는 보육원에 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식사로 나온 찬 밥 한 그릇과, 식은 국 한 그릇, 김치 한 종지를 보며,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크면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가 되어야겠다 막연히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꿈이 돌아보니 이루어 지고 있는 듯 합니다. 지금 저는 아프리카 땅에서! 머쉬쉽의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쉬쉽의 모토는 ‘Bringing hope and healing’ 입니다. 한 손으로는 사람들이 필요한 도움과 치료를,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복음의 소망을 전하는 ‘양손 선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역을 시작하고 10년이 지나고 처음으로 안식년이라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국에서 그리웠던 가족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사계를 10년 만에 경험하겠구나 하는 설렘과 함께(그 동안 배가 다녔던 선교지들은 모두 가난한 나라들이었는데, 덥고 습한 지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일년을 지내야 할까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저의 선교 현장에서의 경험을 나누는 일 입니다 (한국의 머쉬쉽 사무실에서 홍보와 소개 분야를 필요할 때 돕게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선교와 관련된 보고와 간증을 원하시는 교회와 단체가 있다면 저의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다른 하나로는 모교인 신암 교회에서 원하신다면 부족하지만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입니다. (교육부서-중 고등부나 청년부나 선교부의 하시는 일에 제가 힘을 드릴 수 있다면 기꺼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10년 동안 선교 현장에서 맡겨진 일에 매달려 일만 해 왔는데, 안식년 동안에 뭔가 자신을 더 개발하고 배워서 다음 선교를 위해 더욱 유익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 차로 3시간 30분을 울퉁불퉁 달리면 도착하는 지방 도시 부케넌. 이번달 말에 있을 에이즈 컨퍼런스가 이곳에서 열리게 되어 사전 준비차 방문하였습니다. 함께 준비하는 팀 모임도 하고, 작년에 훈련시킨 교회에서 자신들이 속한 교단모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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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은 머쉬쉽의 사역이 끝나는 12월이 지나 1월 중순쯤 귀국을 하려 했습니다, 1월에 들어가도 학교나 교육기관을 알아 볼 수 있겠지 했는데, 한국 상황을 너무 모르고 잡은 계획인 것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머쉬쉽을 소개 해 준 친 언니가 요르단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데, 얼마 전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하다가, 제가 공부를 하고 싶다 했더니, 양재에 있는 횃불 트리니티를 신학교를 소개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웹 사이트에 들어가 알아봤더니 제가 생각하고 바라던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던 에이즈 교육에는 에이즈가 무엇인지, 어떻게 예방할 수 있나 라는 의학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삶을 통해 에이즈에서 자유 할 수 있나 하는 기독교 메시지와 에이즈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생기는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World view’(세계관)도 가르치고, 에이즈에 감염된 이웃을 어떻게 도울 수 있나 하는 실직적인 돌봄(care)을 실습하기도 하고, 이들을 돕기 위해 기본적인 상담 기술도 포함되는 폭 넓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5년이 넘도록 에이즈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면서, 제가 교육과 훈련에 재능이 있음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고, 그! 래도 무언가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기독교 상담’쪽을 더 공부 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익힌 영어가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 것 같기에 한국에서 영어로 교육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한 제가 서울에서 머물 곳이 적당하지 않기에 기숙사가 있는 곳이었으면 했고, 머쉽쉽이 국제 선교 단체여서 늘 다양한 국적과 문화가 다른 선교사들과 생활해 왔기 때문에 국제적인 감각의 학교가 있기를 바랬는데, 횃불 트리니티 신학교는 그 모든 저의 바램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는M.A ( Master of Art) 기독교 상담 석사 과정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또한 선교 현장에서 6년 이상 일한 선교사를 위한 특별 전형이 제 조건에 맞기도 해서 이렇게 이 학교에 입학 신청로 결심했습니다. 특별전형은 성경시험과 영어 시험이 면제됩니다 또한 일반 전형보다 한달 먼저 선발하기에 11월 6일까지 입학지원을 해야 하는 일정이라 이렇게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여 급하게 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선교현장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Out of comfort zone’
자신이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나 새롭고, 낯선 나라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10년 동안 머쉬쉽에서 일하다 보니 배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졌기에 선교 현장을 떠나 다시 본국으로, 본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도리어 낯설고 긴장이 됩니다. 10년 동안 한국 강산이 변했을까? 내가 아는 사람들도 많이 변했겠지? 교회도 내가 기억하고 익숙했던 교회는 아니겠지 … 하는 생각들도 들게 됩니다. 그래서 도서실에서 ‘Re-entry’ 라는 책을 찾아 잃으며 다시 돌아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 중의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누군가 말했을 때 무척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역시 저도 늘 그런 불안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귀국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갑니다.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것이 정말 주님이 원하는 일일까?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 안식년에도 선교후원이 계속될까? 학교에 합격하면 등록비와 수업료 등은 어떻게 채워질까 하는 불안들이 슬금 슬금 올라옵니다. 그때 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 다시 마음을 잡아 갑니다. 지금까지 공급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으며 말입니다. 흡사 선교 초년생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 기분이 듭니다.
10년 전, 사역을 시작한 첫해 어느 날이었습니다. 작은 통통배 같던 ‘아일랜드 머쉬’의 주방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배는 어느 남태평양의 섬나라로 항해 중이었습니다. 아침을 준비해야 했기에 새벽에 일어나 주방으로 가기 전에 잠시 갑판에 나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사정은 무작정 한국을 떠나 왔기에 후원자나 후원교회도 없어 1달러 쓰는 것도 몇 번을 생각 하고 쓸 때였습니다, 영어로 의사소통도 안되고, 처음 해 보는 힘든 주방 일에…… 매일 매일이 삶의 도전 이었던 때였습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혼자 중얼 거리며 눈물을 훔치던 때? ?있었습니다.
갑판 문을 열자 알싸한 새벽 바다 바람이 밀려 왔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일출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뭐라 말로 표현 못할 아름다운 해돋이에 저는 넋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뭉클하면서 ‘ 아. 내가 부족 한 게 하나도 없구나’ 라는 충만감에 가득 찼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자연 속에 임재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 봉마인에서 HIV 컨퍼런스를 마치고 호수를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철광석 광산이었는데, 이 호수는 철광석을 캐낸곳에 물이고여 만들어진 인공 호수랍니다. 전쟁동안 모든 시설이 망가져 지금은 철광석 개발이 중단된 상태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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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23편 1절
그 날 저는 부족함이 없는 저를 보았습니다. 그 후로 불안과 의심, 갈등이 올 때면 그 날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그러면 생생하게 그 때의 장관과 충만함이 되살아 나며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곤 했습니다.
삶이 무겁게 느껴지고, 선교사로써의 소명이 흐려져, ‘언제까지 제가 결혼도 못하고 배에서 일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따지듯 물어볼 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너무나 흔하게 들어왔던 이 성경구절이 그 날은 가슴으로 깊게 들어왔습니다. 이 한 구절이 저의 많은 질문에 답을 주었고, 더 이상 불평, 불만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 후로 마태복음은 6장 33절은 선교사로서의 저의 하루 하루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학업을 위해 한국에는 11월 2일에 도착하게 됩니다.
만약 합격이 된다면 2년간의 석사 과정 밟고 논문을 써서 수료를 하게 됩니다. 합격이 안 된다면 1년 동안 한국에서 더 짧은 상담 분야의 공부를 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다시 선교의 장으로 되 돌아 갈 예정입니다.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한 선교사로 더 많이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모든 과정과 일정이 너무 급하게 진행 되었으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밟아 가려 합니다.
가까이서 멀리서 제가 지금의 저의 모습이 되어 가는 것을 지켜 봐 주시고, 기도로 재정적 후원으로 함께 동역 해 주신 여러분 모두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따듯한 관심과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jleunok@hanmail.net
후원 계좌번호는 외환은행 147-19-20775-9 (이은옥) 입니다.
주님의 평안과 축복을 빌며 아직 라이베리아에서 이은옥 선교사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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