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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논문 등록일 2008-08-11
작성자 관리자 (admin)
대위임The GREAT commission2 (마태복음 28:16-20)
창조로부터 새 창조에까지
저자: Grant LeMarquand
역자: 문전섭선교사

때때로 그것의 정체성을 "대위임" 신학교로 말하였던 신학교육기관의 교수요원으로서 우리는 이 토론의 어느 곳에서 나타날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라는 예수의 명령(마 28:16-20)에 대한 마태복음의 말을 기대할지 모른다. 물론 이 본문으로 시작함의 위험은 그러한 출발점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전도"나 혹은 "제자삼기"라는 말로만 선교를 생각하고자하는 유혹을 받을 수 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결정적으로 중요한 활동들을 은폐하려는 마음은 없는 것이다-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말들이 개인주의적으로나(널리 "개인적인 결단"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는 복음전도)나 혹은 교회적으로("교회성장"이나 혹은 "교회심기"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는 제자삼기) 들려지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제발 나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도처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들어야 하며, 그분을 그들의 구주로 삼도록 초청되어야 하며, 또한 상호적인 교화와 봉사를 위하여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도록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들을 우리의 선교 신학에 있어서의 중심적인 자리에 두는 것은 (때때로 그렇게 한다) 선교는 우선적으로 "우리"에 대한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개인들로서와 그리고 교회로서 우리의 노력에 대해, 우리의 성장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희망하기로 우리가 보겠지만 , 나는 성경이 선교에 대해 말하는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선교 명령에 대한 마태복음의 말은 그러한 종류의 유일한 것은 아니다. 누가복음은 두 개의 그러한 위임들을 갖는다. -하나는 누가복음에서이고 하나는 사도행전에서이다. 요한복음은 또한 대위임에 대한 특이한 말을 갖는다.3 우리는 두 개의 누가의 구절들로 시작해서 차례로 각각을 살펴볼 것이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임하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4"4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주제들을 주목하라: 제자들은 나라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을 하려는 것이다. 메시지가 선포하라고 그들에게 주어졌을지라도, 선포의 기초는 하나님의 행동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보여 졌고 또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이루어졌다. 누가에 의하면 선교선포는 제자들에게서 그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동에서 갖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또한 "대위임"에 대한 그것 자체의 말을 갖는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20:21-23)

요한의 증언이 독특하다할지라도(여러 가지 방식에서), "대위임"에 대한 다른 말들과의 몇 가지 유사점들은 명백하다: 죄의 용서가 다시금 중심적이다; 성령의 능력과 임재가 선교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한은 우리에게 선교는 우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선교는 어떤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며, 혹은 식민주의의 종교적 병기로서의 빅토리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어떤 위대한 새로운 사상이 아닌 것이다(19세기 교회 역사를 이런 방식으로 읽을 유혹이 많이 있는 것처럼). "선교"는 새로운 성원들을 "클럽"으로 끌어들이려는 방식이 아니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건축 프로그램들과 봉급들을 유지하려는 더 많은 "부과금"(십일조)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선교는 우리의 프로젝트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프로젝트들인 것이다. 그것을 약간 시대에 맞지 않게 말한다면, 선교는 그것의 근원을 삼위일체의 삶에서 갖는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고, 성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준비시켜 교회에 보낸다. "대위임"의 마태의 가장 자주 인용되는 말은 이들 주제들의 몇 가지를 공유하는데, 그러나 이것들을 우리에게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 한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6-20)

다시 한 번 누가와 요한의 위임들에 친숙한 주제들이 또한 여기에서 발견 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메시지를 나라들에게, 이방인들에게 가져오도록 위임을 받는다. 용서가 여기에서 명백히 언급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나는 우리가 용서의 메시지가 이 구절에서의 세례의 언급에서 암시되어있다고 족히 가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주의를 하나님의 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확실히, 우리가 누가복음과 그러나, 또한 특별히 요한복음의 본문들에서 암시된 것으로 보았던 삼위일체의 주제는 여기 세례식에서 명백하게 된다. 그러나 이 본문의 대부분의 해설들에서 흔히 놓치게 된 것은 그 구절의 끝부분이다. 나는 흔히 이 구절이 19절의 끝에까지만 혹은 때때로 20절의 중도까지만 들려지거나 혹은 인용되어진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 구절의 끝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교과업에서의 교회와의 예수의 끊임없는 현존의 약속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흔히 주목되지 않는 것은 이 약속이 마태가 그 복음의 초두에서 시작하였던 주제의 정점인 것이다. 그 복음의 첫 장에서 마태는 (또한 마태만이 이것을 언급한다) 우리에게 예수가 "임마누엘"이라 일컬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마태복음 1:23).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언급과 그리고 선교-안-교회에서의 예수의 끊임없는 임재의 약속은 전 복음을 "포괄적인"일괄하여 다룸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 복음서의 중간에서 우리는 또 다른 괄목할만한 본문을 발견 한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18:19-20)

이 본문은 그것이 그 복음서의 시작과 말미를 예수의 현존의 약속으로 메아리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 구절의 그 흥미 있는 유대적인 맥락 때문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유배에서 그 자체를 발견하고 또한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소외되었을 때, 토라를 중앙의 위치에 두었던 예배의 체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미쉬나의 소논문 Pirk Abot(3:.2)에 따르면,

R. Hananiah b. Teradion은 말하였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율법에 대한 말이 그들 사이에 말하여지지 않는다면, 오만한자들의 자리에 않지 말라고 쓰여 있는 대로 [시편1편]두 사람이 오만한 자들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율법의 말들이 그들 사이에 말하여진다면, 신의 현존[Shekinah]이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바빌론에서의 유대인들이 성전이 토라로 대치되어, 성전 및 그것의 의식들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이 상실되었던 것과 꼭 같이,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물리적인 부재가 그들을 불안한 채로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되었던 것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바로 신의 현존이신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의 말미에 따르면, 그는 우리가 "만국들에게"의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때 특별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선교는, 우리가 이 본문들로부터 보는 것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선포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하여, 예수를 보내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 과업이 교회에 의하여 계속되는 때 성령의 현존의 약속에 대하여. 선교는 우선 인간의 프로그램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인간의 기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선교는 삼위일체의 삶에서 그것의 기원들과 그리고 그것의 계속함과 그리고 그것의 완성을 갖는 것이다. 복음전도와 제자삼기와 그리고 교회심기는 우리의 삶의 필수적이며 긴요한 양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이르심의 일부이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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