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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오피니언 > QT 등록일 2008-05-31
작성자 관리자 (admin)
살아 지는구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성경강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성경강해

(본문)마태복음 6장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살아 지는구나!
1.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인가?
2. 생육과 생존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3.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4. 오늘날 강단에서는 경제 문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기업에서, 방송에서, 학교에서, 선거연설에서, 가정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수없이 되풀이해서 듣고 있는 말이다. 세상을 온통 전쟁터로 생각하는 그 살벌한 사상은 아주 옛날부터 있어 왔지만 19세기 말, 챨스 다윈이라는 사람이 진화론을 설파하면서 비로소 공식적인 코드값을 갖게 된다. 코드값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워낙 남들보다 빠른 적응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말을 자기 입맛대로 형편대로 조금씩 바꿔 말하면서도 마치 자기가 터득한 새로운 사상처럼 떠든다.

“2등은 없다, 1등만이 선택된다.”
“마누라, 자식 만 빼고 다 바꿔라. 그래야 살아 남는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영원히 후진국으로 전락한다.”

1973년 미국 닉슨 행정부의 농무장관이었던 얼 버츠는 미국의 농민들에게 “농업도 기업경영처럼 해야 하며 스스로 ‘농민’이라 하지 말고 ‘농업 기업가’로 여기라”며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했다. 그가 또 하나의 명언을 남겼는데 “적응하지 않으면 죽는다!”

살아지더라구요!

2008년 2월 26일, KBS ‘6시의 내고향’이라는 방송 시간에 ‘아름다운 귀촌일기(歸村日記)’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 날 전미옥 주부(39세)가 소개되었다.

그녀는 장애인인데 서른 다섯살에 두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하고 바로 충남 보령의 한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녀는 도시에서만 자라 바닷가 시골생활이 생소하고 많이 어려웠다. 신혼살림은 흉흉하게 버려진 폐가에서, 수중에 가진 돈도 없이 시작했다. 치자, 홍화, 황토 등 천연재료로 염색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수입이 거의 없어 바닷가에서 조개를 채취하고 농사일에 품을 팔면서 보충했다. 그러면서도 좋은 이웃이 되고자 먼저 다가갔고, 4년 동안 틈틈이 자신들 손으로 아담한 집을 지었다.

내 영혼을 감동시킨 그녀의 한마디 말, “처음엔 고생도 많았지만 하루 하루 살아 지더라구요!”
살아남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차이

사람이 스스로 “살아 남아야 한다” 혹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그저 착각이거나 거짓말 정도로만 여길 수 없는 마귀의 악한 사상으로 인간을 자기 노예로 속박하기 위한 전략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전혀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사람이 아니, 모든 생명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2중 3중, 겹겹이 둘러쳐진 하나님의 보호망, 생명을 축복하며 번성시키는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經綸), 모든 생명들이 자연과 환경 속에서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씨줄날줄 처럼 얽혀서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공생공존하는 세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그저 악착같이 살기 위한 존재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생존(生存;Survival)에 매달리는 비천한 존재가 아니라, 생육(生育;Fruitful)을 축복받은 거룩한 존재인 것이다.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랑으로 나누며 풍성한 기쁨을 노래해야 할 ‘충만한 존재(Full Being)’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셔서 심히 주리신 때에 마귀는 당면한 생존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였다.
“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거짓말하고 불안감을 심어 주어 인간을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존재로 타락시켜온 마귀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공중의 새, 들의 백합도 아름다운 생육을 노래하고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 너희들이 생육의 축복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사람이 생존의 나락으로 떨어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토마스 홉스)을 하는 현실은 자원이 핍절해서도 타고난 생존본능이 그래서도 아니다. 거짓 영, 마귀의 거짓말에 속기 때문이다.

오늘날 피비린내 나는 내란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기 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형제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출처 : 송모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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