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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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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 > 동유럽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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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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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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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ad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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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유럽국가 중 탈종교화 경향 두드러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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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에 취한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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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는 전유럽에서 무신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신의 존재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종교가 인간들의 궁극적인 질문에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난 탈종교 세속화의 영향은 그 어느 곳보다 체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2차대전 직후까지 전체인구의 90%이상이 신을 존재를 믿었고, 그중 상당수가 신도였던 종교 국가가 이처럼 무신론 국가로 변화하게된 것은 무엇보다도 공산정권 시기의 종교탄압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러나 인접한 폴란드가 현실사회주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인구의 90%이상이 가톨릭 신도라는 점에서는, 체코인들의 종교적 열광 감소와 믿음 하락을 공산정권의 종교탄압 정책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 보다 본질적인 요인은 체코인들의 종교관 변화에 있다.
흔히 체코인(특히 남자)의 숭배대상은 여자, 맥주, 신이라고 한다. 이 순서는 점차 맥주, 여자, 신의 순서로 바뀌는데, 신의 존재가 체코인들에게 있어 속(俗)을 상징하는 여자와 맥주에 성스러움의 지위를 빼앗기게 된 것은 체코만의 독특한 종교사와 종교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
체코에서의 종교는 가톨릭과 후스주의간의 대립의 역사로 요약된다. 15세기 얀 후스(Jan Hus)의 종교개혁 이후 체코인들의 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카렐대학 학장이며 종교개혁가였던 후스는 가톨릭의 부패상을 비판하고 교회의 위계적 구조와 불평등을 지적하면서, 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자성을 촉구하는 ‘프라하 4개항’을 발표해 가톨릭과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후스가 절대적 권위를 지닌 가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일반 대중들의 대변자이자 민족의 영웅으로 등장했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후스를 당대 최대의 이단자로 규정했고 결국 1415년 후스를 화형시켜 버렸다. 이를 계기로 체코에서 후스를 추종하는 후스파와 가톨릭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후스파의 승리로 체코인들은 종교의 자유권을 얻었고 후스를 민족의 영웅이자 순교자로 인식했다. 그러나 체코에서의 종교적 관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18년 ‘2차 프라하 시청 사건’을 계기로 후스파와 가톨릭이 두 번째로 충돌했고, 이 전쟁에서는 후스파가 패배했다. 이후 체코에서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로 선포되어 가톨릭 이외의 종교는 금지되었다. 1620년 빌라호라(Bilá Hora)에서의 패배는 체코 역사에서 암흑기의 시작으로 기록될 만큼, 체코인들에게는 참담한 패배였다. 재가톨릭화가 진행되면서 체코 인구는 1/3이상 격감했고 독일인 가톨릭 교도가 체코를 지배했으며, 후스주의와 관련된 모든 유산은 파괴되었다.
빌라호라의 패배는 비단 종교전쟁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민족의 패배로 묘사될 정도로 체코 역사에서 최대의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체코인들은 독일인 가톨릭교도(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조가 체코를 1918년까지 통치)의 재배를 받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던 후스를 더 이상 추종하지 못했다. 강제적인 가톨릭화로 체코인들은 표면적으로 가톨릭을 수용했지만, 그들 내면에는 계속해서 후스에 대한 추종, 체코인으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체코인들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곧 독일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던 만큼, 가톨릭은 단순한 종교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민족의 굴욕을 상징하는 종교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면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국가가 독립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당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 대다수가 가톨릭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체코에서의 가톨릭과 슬로바키아에서의 가톨릭은 같은 종교이면서도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체코에서의 가톨릭이 민족의 상처였던 반면 슬로바키아에서의 가톨릭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시킨 중심체였다. 체코와는 달리 슬로바키아에서는 1,000여년에 걸친 헝가리의 지배 속에서도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자신들의 유산을 지키고 독립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기반이 바로 가톨릭 교회였다.
체코의 가톨릭과 슬로바키아 가톨릭이 대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39년 히틀러의 지원으로 슬로바키아가 체코와 분리독립 하면서부터였다. 비록 이 분리가 6년간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이것은 체코인들에게 슬로바키아인들이 민족의 배신자이며 그 중심에는 가톨릭 교회가 있다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주도한 사람은 가톨릭 성직자였으며, 바티칸은 슬로바키아 독립을 승인하고 성직자가 국가수반이 된 것을 환영했다. 결국 체코인들은 이 사건으로 슬로바키아인들과 정서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으며,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교회를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1945년 다시 국가가 통합되어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으며, 1948년 공산화를 거치면서 가톨릭은 가장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89년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에서는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교회를 떠났던 예전의 많은 신도들이 다시 교회를 찾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신도의 비율이 줄어들고 그나마 나머지 신도들의 종교적 열정이 감소되면서,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종교의 위기상황에 당혹해했다. 그러나 이것은 체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당연한 결과이다. 체코의 종교사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과 반목의 역사였다. 17세기 재가톨릭화 이후 체코인들은 낮에는 가톨릭을 그리고 밤에는 후스주의를 비롯한 개신교를 믿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재가톨릭화의 압력으로 체코에서의 개신교는 이 시기부터 점차 세력을 잃게 되었고,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후에도 개신교와 가톨릭 두 가지 종교 모두가 종교로서 보다는 문화유산의 의미로 남게되었다.
한편 재가톨릭화를 거치며서 체코인들이 채득한 한가지 삶의 법칙은 자신들보다 강한 세력에게는 도전하지 않는 태도였다. 평안(nahoda)으로 번역되지만 좀더 복잡한 의미를 지니는 이 개념은 1620년 빌라호라의 패배이후 체코인들의 정서와 생활속에 남아있는 삶의 지혜가 되었다.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침공에 무력저항을 하지 않았던 사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개혁정책이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의해 제지되었을 때 변변한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평안이라는 삶의 법칙 때문이었다. 이같은 체코인들의 삶의 지혜는 지난 수세기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과 반목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도 프라하의 관광명소인 구시가 광장 중앙에 서있는 후스像과 바츨라프 광장의 바츨라프 기마상은 각각 후스주의와 가톨릭을 상징하는 유산이다. 불과 몇 백미터의 거리를 두고 두 종교의 상징물이 공존하는 것은 지난 600여년간 체코의 종교사와 종교문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체코에서 가톨릭과 후스주의는 종교적 의미보다는 문화유산의 의미가 강하다. 각종 종교행사나 기념일, 세례 그리고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이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이들이 종교적 열정을 갖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들의 오랜 전통 때문이며, 부활절, 성탄절이 지켜지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휴일로서 인식될 뿐이다. 이미 가톨릭 교회와 후스상은 수없이 밀려드는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도구로,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며 입장수익을 올리는 장소로 변모되고 있다.
출처 : 김신규·동유럽발칸연구소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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