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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단체 > KWMA 등록일 2006-11-25
작성자 관리자 (admin)
사도행전 15장과 무슬림들 가운데 내부자운동 : 문제점들, 진행과정 및 결론들
Kevin S. Higgins

본 자료는 '제6회 한국선교지도자 포럼'이 2006년 11월 15일(수)~ 16일(목)까지 강화성산예수마을에서 '전방개척 선교위한 1차 5개년 개발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케빈 히긴스가 발표한 내용이다.

특별강연 및 전체 토론회 ②
사도행전 15장과 무슬림들 가운데 내부자운동 : 문제점들, 진행과정 및 결론들
사회 : 전학진 선교사/한국SIM 대표
발제 : Kevin S. Higgins



이슬람 안에서 C-5 운동을 다룬 자신의 글에서 우드베리(Woodberry) 박사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야기를 검토하면서 자신이 전세계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에 기초하여 그 유사점들과 결론들을 이끌어 내고 있다. 본인이 쓰는 글의 상황 일부가 그의 해설을 구성하며, 이 글의 독자가 사도행전 15장으로부터 우드베리가 이끌어낸 7 가지 요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글을 쓰고자 한다.
바라기는 우드베리에 의하여 제기된 것들과 관련된 어떤 이슈들을 정밀 조사하여 그들 중 몇 가지 가운데 보다 깊숙이 들어가고자 한다. 본인이 이 글에서 의도하는 바는 사도행전 15장의 구절들을 조사하면서 그 논지를 펼쳐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5장의 지도자 모임에 의하여 제기된 두 가지의 주요 질문과 그 답을 구하는 진행과정 그리고 그들이 도달한 결론들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그 이후에는 거기서 찾아낸 것들과 현재 선교계에서 토의되고 있는 것을 비교할 것이다. 특별히 그것을 무슬림 가운데 내부자운동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인지 토의함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질문(들)인지 명백히 하고자 한다.
끝으로, 사도행전 15장의 연구에 기초하여 몇 가지 결론들과 한 실천가로서 본인의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여기서는 앞으로 더욱 해야 할 연구 방향에 대한 언급도 포함할 것이다.

사도행전 15장: 문제점들, 진행과정, 결론들

사도행전 15장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더욱 폭 넓은 사역들의 한 복판에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유대교 개혁운동이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세상으로 알려져 예수께 향하는 하나의 이방인 운동을 탄생시켰는가에 대한 이야기의 중심부를 자리잡고 있다. 그 장은 구조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사도행전의 분수령이 되는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Marshall, Acts, p. 242, 및 Strong, in Mission in Acts, p.197). 사도행전 15장은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복음이 누가복음에 있는 바 예루살렘이라는 하나의 중심에서 사도행전 1 ~ 12장에 걸쳐 이방인에게 움직여 가고 진정 사도행전 28장에 이르러서는 로마라는 중심으로 이동하는 진행과정에 대한 누가의 기록 내용에 지리학적 회전축 역할을 제공한다. (보쉬의 누가복음-사도행전 논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Transforming Mission, pp. 93-94 and 115ff.). 따라서, 우리의 사역을 위하여 이 부분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정말 어떻게 무슬림 가운데서 예수께 향하는 운동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기술된 바와 같이 태동하는 이방인 예수운동과 비교되는지 당장이라도 곧 바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뛰어들기 전에 과연 그러한 유사성이 적합한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것인지 보다 완전히 알기 위한 준비로서 사도행전 15장을 보다 자세하게 탐구할 것이다.

질문들: 사도행전 15:1-5.

안디옥의 이방인들 가운데 있었던 새로운 사역은 (사도행전 11:19 이하) 바나바라는 인물을 통하여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의하여 이미 점검(check) 되었었다. 더욱이, 안디옥 운동은 이방인 사역 확장을 위한 의도적인 수고로 처음 기록되는 결과 또한 낳았다 (Acts 13:1 이하 및 14:8 이하.).
사도행전 15:1에서 5절을 읽을 때에 우리는 바리새파 유대인으로 어떤 믿는 자들이 할례가 없이는 이방인 믿는 자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조, Marshall, Acts, 247이하). 진정 이 형제들의 우려는 할례 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었으며 율법(토라) 전체를 포함하였다: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행전 15:5).
따라서, 문제를 삼고 있는 그것은, 어떻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며, 이 새로운 운동 가운데에서 할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할례를 포함하는 율법의 위치는 무엇인가와 같이, 기초적이고,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이슈였던 것이다. 이 신학적인 혹은 사실상 구원론적인 질문은 11절에 있는 베드로의 결론에서 더욱 집중 조명되고 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다른 말로 하면, 이는 단지 일종의 문화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5 장의 이슈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단지 문화적으로 유대인이 될 필요가 있느냐 아니냐에 대한 질문이 아닌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지도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슈는 주로 구원에 대한 것이며 그와 관련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이 지속하여야 하는 그 위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 가운데 내부자운동에 대한 토의를 함에 있어서 그것이 단지 문화나 양식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기초적인 이슈가 바로 구원의 문제이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거룩한 책이 지속하고 있는 그 위치에 대한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회의들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모임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야고보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어떠한 필수적인 것들을 묘사한다. (15:19 이하와 15:28을 비교하라). 성경 주석가들과 선교학자들 간에 일반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이러한 필수적인 것들이 식탁의 친교(table fellowship)에 관련된 것으로 보며, 말하자면 그것은 교회의 연합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친교가 야고보의 결론에 기록된 네 가지 요소들의 배후에 있는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 이후의 글에서 명백하다. 그러나, 분명 그 이상의 것도 있는 듯하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서로간의 친교 이슈에 대한 관련성을 직접 제공하지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에 대한 지적은 그것을 뛰어 넘는 듯하다. 즉,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이 새로운 이방인 운동에서 지속된다면 양자간의 친교가 단절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행위로부터 멀리하라고 하는 요청은 단순하게 식탁의 교제를 위한 주장 그 이상으로 하나의 깊은 우려에 뿌리내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네 가지의 항목에 대하여 연합을 위한 필수라고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 가운데에 두 가지는 음식과 관련된 것이어서 (피, 목매어 죽인 것) 식탁의 교제와 직접 관련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기초적인 윤리문제(음행)와 관련된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는 충성도 및 세계관에 있어서 (우상숭배) 근본적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 15장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주된 질문이 있다. 중심 되는 질문은 (비록, 그것이 율법과도 관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원에 대한 것이다. 지도자들이 서로 만났을 때에 우려를 갖게 된 또 하나의 주요 질문이 이방인 배경의 신자들과 유대인 배경의 신자들 사이에 연합을 위한 필수에 대한 질문이었다.
우리가 할례를 다룰 때에 이 문제로 돌아갈 것이며 무슬림들 가운데에 내부자 운동에 관련하여 다시 비슷한 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이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현재로는, 다만 무슬림 가운데 내부자운동을 토의하기 위하여 어떠한 질문들이 사도행전 15 장에 있는지 가능한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한 무슬림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것은 무엇인가?
무슬림 가운데 예수께 향하는 운동에 속한 믿는 자들과 다른 배경(예를 들면, 서구의 크리스천)의 예수께 향하는 운동에 속한 믿는 자들 사이에 연합을 위하여 무엇이 필수적인가?

진행과정: 사도행전 15:6-18.

본인의 사도행전에 대한 요약을 15:5절에서 일단 잘랐다. 사실상, 위에 요약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구하는 진행과정은 사도행전 15:6절 보다 그 이전에 시작하였다 (실제로 사도행전 15장 이전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안디옥 자체 내에서도 이미 광범위한 토의와 주장들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행 15:1 이하). 그 토의에서는 주요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전 교회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5:3).
나아가,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면서 수 많은 논란이 지속된다 (15:7). 마찬가지로 몇 가지의 회의들이 있었다. 분명 15:6은 15:4에 기록된 것과는 구분된 다른 회의인 것으로 보인다 (참조: Marshall, Acts, p. 249). 분명 여기에서는 관점에 있어서 서로 (공손한 태도를 가지고) 주고 받는 진행과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태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서 본문의 길이 자체 이상의 과정이나 그 공동체적인 속성도 포함하고 있다. 우드베리 박사 또한 자신의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자신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일들을 증거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분명 그 회의가 이루어진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에 하나가 특별히 고넬료 사건 가운데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 가운데에 있었던 이적과 기사의 증거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경험적인 확증 때문이었다.
우리는 또한 논의 가운데에 성경의 위치가 어떠한 역할인지 알아야 한다 (우드베리의 글을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첫째로, 바리새파로서 믿는 사람들은 모세에게 주어진 성경적인 계시를 가르치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매우 강력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토라(율법)에서 (할례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어떤 것이라도 포함하여) 그 성경적인 참조 점들로 숫자에 구애됨이 없이 언급함으로써 율법의 타당성을 보이고자 하는 것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야고보도 성경말씀에 의지하고 있다. 여러 다른 입장의 이야기들을 들은 이후에 그는 일어서서 베드로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자신의 결론을 내어 놓는다. 그는 선지자들의 말과 베드로가 일치한다는 결정적인 점을 지적함으로써 결론의 서두를 삼았다.
여기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야고보는 베드로의 보고에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권고하셨다(방문하심: visit)고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용한 단어이다. 누가복음, 1:34; 68; 78 그리고 7:16절에 이 단어가 쓰이고 있다. 참조: Marshall, Acts, p. 251). 거기에다가, 하나님께서는 열방(헬라어: 에뜨네, ethne)으로부터 한 백성(헬라어: laos)을 자기를 위하여 데려오시기 위하여 이렇게 하셨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아모스 9장을 그 주된 본문으로 언급하지만, 예레미야 12장과 이사야 45장을 마찬가지로 언급할 수도 있다. 바리새파 출신의 형제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신들의 입장을 이미 주장한 바 있어서 야고보는 구원과 율법에 대한 질문을 다루면서 그 전체적인 기준을 효과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위에 지적한 처음 두 가지는 야고보의 관점에서 이방인이 들어오는 것은 이스라엘 형성 자체에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열방으로부터 한 백성을 이루시는 것을 바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이방인을 더하고 계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이방인들 가운데로부터 한 백성을 이루고 계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 백성들(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라는 명백한 실제가 그 회의에 대한 두 번째의 주요 질문이다. 즉, 어떻게 이들 두 백성들이 서로 관계할 것이며 교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백성을 당신을 위하여 형성하셨고, 또한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위하여 한 백성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들 두 백성들이 서로 관계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들이 비록 나뉘어져 있고 고유하지만, 그들의 연합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 이 질문을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자면, 우리는 시간을 두고 공동체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많은 논의를 포함하는 하나의 진행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은 기적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으로 입증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신 일에 귀 기울이는 것을 또한 포함하였다. 더욱이, 그 과정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포함하는 성경말씀에 대한 논쟁과 토의를 포함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진행과정의 끝이 아니다.
사도행전 15장 전후로 할례, 율법 그리고 식탁의 교제에 대한 문제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에 예수께 향하는 운동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에 주된 이슈들이었음은 명백하다. 여기에서 시간순서에 입각하여 그 모든 사건들을 추적할 여유는 없지만, 시간에 따라서 다음의 몇 가지 사항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1. 갈라디아서: 율법, 할례 및 음식이 모두 중요한 이슈들이다. 갈라디아서 2 장의 사건들은 사도행전 15 장의 예루살렘 회의 이전에 발생하였다.
2. 사도행전 15장.
3. 고린도교회를 향한 첫 번째 서신: 할례나 율법의 강요와 같은 것은 없는 반면에 여전히 음식, 음행 및 우상숭배의 이슈들에 대한 가르침의 필요가 명백히 들어 있다.
4. 로마서: 율법, 할례, 및 음식(14장과 15장을 보라)이 그 모든 두드러지는 주제를 이룬다.
5. 골로새 및 에베소서: 명백하게 그 이슈들이 강요하는 것으로서 주어지지 않지만,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언급이 여전히 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과 3장에서 율법의 나누는 벽을 허물 것과 그것이 내포하는 새로운 교제에 대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비록 위의 내용이 개략적이고 피상적인 개관이긴 하지만, 예루살렘 회의의 주의를 끄는 이슈들은 사실상 심지어 그 회의 이전에도 잘 제기되었던 것이며 그 이후에도 상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시대와 상황에서도 그러한 질문을 다룸에 있어서 진행과정이라는 속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비록 본인은 사도행전 15 장의 회의에서 두 가지 주요 질문에 대하여 집중조명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한 토의는 여러 가지의 또 다른 관점들을 금방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회의가 갖는 권위의 속성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브루스와 마샬의 갈라디아 후서의 관점을 따른다고 한다면) 바울은 결코 야고보의 글을 인용하지도 그 회의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그가 실제적으로 그 회의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며 구속력을 갖는다고 바라보는지 궁금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내부자운동이라는 토픽에 가능한 맞추어서 바라본다면 (특별히, 누가 그들에 대한 권위를 갖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여기서 이 주제를 추구하는 것은 본 논고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이 회의에서 야고보에 의하여 요약된 그리고 사도행전의 편지에(15:22 이하) 쓰여진 결론에 다다른 내용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결론들: 사도행전 15:19-29.

그 결론의 첫째 요소가 야고보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발견된다: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사도행전 15:19).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이라는 구절은 회심을 언급한다 (14:15과 26:20을 참조하라). 야고보가 이방인들의 회심에 대하여 의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진술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있다는 사도행전의 이 문구는 이방인들이 신실한 구도자나 관심자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의 것임을 확증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동료 믿는 자들이다. 이는 15:23절에서 이방인들을 형제들이라고 언급하고 그리고 동료들을 형제들이라고 기록하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는 그의 진술과 더불어 그 다음 구절은 매우 강한 의미의 그러나(헬라어의 alla가 쓰인다. 이보다 약한 것으로 de가 있다)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한다. 즉,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네 가지의 것을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15:20)라고 말하고 있다. 그 똑 같은 네 가지가 15:29절의 편지와 21:25절에 반복되어 있다. 이러한 삼중적 반복은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사도행전 전체를 통틀어 스데반의 순교, 바울의 회심 및 고넬료 사건과 같은 단지 몇 가지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언급에서 사용되고 있다 (Dollar, St. Luke's Missiology, p. 108). 분명히, 이러한 것들을 네 가지의 필수적인 것들로서 제한하는 결정은 누가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왜일까?
다음 절인, 15:21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기 위함이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뀛 여기서 이는(for)이라는 단어 주어지고 있는데, 그와 함께 시작하는 구절이 그 네 가지의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서 제한하는 결정을 왜 하였는가 대한 설명으로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명쾌함은 그것이 여기에서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마샬(Marshall (Acts, p. 254))은 이 절에 대하여 두 가지의 주된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야고보가 모세의 가르침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제발 이들 네 가지의 것을 멀리하라. 그렇게 하면 유대인들과 더불어 지나친 마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거나, 다른 하나는, 제발 이들 네 가지 것들을 멀리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모세의 가르침이 널리 알려져 있고 너희 이방인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을 더욱 배워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입장은 지지하기가 곤란하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5장의 전체 논쟁을 통하여 이방인들은 구원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고보가 두 가지의 입장을 모두 이야기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야고보가 네 가지의 것들을 이방인들이 최소한의 것으로서 지킴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시작하고 그 다음 나중에 나머지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가 주장하는 (좀, 이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야고보가 단순히 하나의 양보(concession)를 구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피나 목메어 죽인 것에 대한 이슈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있는 베드로의 환상은 일어나서 깨끗하지 못한 음식들을 먹으라고 하는 삼중적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마가복음 7:19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미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천명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항목들을 멀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연합, 특별히 식탁의 교제 가운데에 필요한 연합을 목적으로 양보를 요청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우상숭배와 음행을 멀리하는 것은 유대인들 가운데에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에 이방인 운동에 대한 공격적 자세를 자제하도록 하는 하나의 양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약성경 가운데에 그 타당성 있는 증거로서는 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선의 선택이 15:21절을 하나의 (양보가 아니라!) 최소한의 요구사항들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한가지는 윤리적인 것을 또 한가지는 신학적인 요구를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보고 그와 동시에 15:21절의 결정이 친교가 이어갈 수 있도록 두 가지 특정한 음식에 대하여 이방인들에게 양보를 또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유대인 자신들이 할례를 놔두고라도 사도행전 10장에 있는 세례에 앞서서 이방인들을 인정하고 축복하는 데 하나님 자신이 선호하시는 증거에 기초한 양보사항들을 유대인 자신들이 명백하게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감정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있게 된다. .
사실상,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양보사항이라는 단어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을 그저 하찮은 것이 되게 하는 위험성이 있다. 야고보와 그 회의는 예수께 돌아오는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이방인들에게 토라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이방인들만이 문화적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 또한 종교적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결론이 갖는 중요하며 진보적인 성격은 특히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따라서, 이들 네 가지의 필수 사항 가운데 두 가지는 이방인 가운데에 믿는 자들이 참조하여야 할 양보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다른 두 가지 것은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이슈들이다. 이들 네 가지 것들을 모두 합쳐서 두 운동 사이의 연합을 위한 필수 사항들이라고 진술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러한 요구사항을 지키는 것이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라는 암시는 전혀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상, 편지로 발송되는 결정된 내용은 이들 네 가지 사항 모두가 하나의 짐(burden)으로서 그것을 유대인 지도자들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조: 15:28. 그리고 다음을 보라: Marshall, Acts, p. 250).

사도행전 15장 토의의 요약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행전 15장 구절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 요지들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연합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지는 진행과정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사도행전 15장으로부터 이러한 과정이 여러 가지의 경우를 포함하고 오랜 그리고 열린 토의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았다. 또한 성경말씀이 비중을 가지며 단지 율법(토라)에서만 인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폭 넓은 기준의 조명하에 조사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또한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이슈들에 대한 그 진행과정이 지도자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기 이전에 이미 일어난 것이고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들을 간략하게 요약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도자들의 결론, 특히 야고보가 말한 것으로 그 편지에 있는 결론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무슬림들 가운데서 예수께 향하는 내부자운동에 이러한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글의 초기 부분에서, 본인은 이러한 적용을 진행하기 이전에 사도행전 15장을 먼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사도행전 15장과 무슬람 가운데 내부자운동

예수께 향하는 이방인 운동 대신에 만일 그들이 무슬림 가운데 예수께 향하는 내부자 운동을 고려할 것에 대한 요청을 받는다면, 사도행전 15장의 회의가 어떻게 되었을지 숙고해야 할 요구가 주어졌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하여 본인은 사도행전 15장 조사에 사용한 동일한 세 가지의 주된 요지를 사용할 것이다. 즉 그것들은, 질문들, 진행과정, 그리고 결론들이다.

질문들: 무슬림 가운데 내부자운동

어떤 의미에서 사도행전 15장에 들어 있는 문제들은 무슬림 가운데 내부자운동의 주제와 더불어 씨름할 때에 또한 적용할만하다.
무슬림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부자운동 가운데에서 사실상 무슬림들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윤리적, 신학적인 최소한의 것들 및 문화적인 양보 사항들을 포함하는 연합을 위한 필수적인 것들은 무엇인가?
분명 이러한 것들만이 최근 C-5 논의와 내부자운동 가운데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질문들은 아니다. 최근 미션 프런티어에 발표된 랄프 윈터 박사와 게리 코르윈 사이의 열린 논의는 동일한 호에 역시 실린 죤 파이퍼(John Piper)의 개략적인 글처럼 그러한 질문들 중에 어떤 것들을 다룬 대표적인 요약이다.
그곳과 기타 다른 곳에서 제기된 질문들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새로운 신자들은 신앙의 필수적인 것들(예를 들면,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무오한 계시임을 믿는 것,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믿는 것 등)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2. 그 이전의 종교적인 습관들(예를 들면, 이전에 모스크를 나가던 행위 같은 것)이 잘못된 것을 드러내고 있는가?
3. 내부자운동 가운데 속한 사람들이 알기 쉬운 진리를 말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남을 속이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면, 특히 우리는 무슬림이다라고 말할 때에)?
4. 내부자운동이 실제로 선교학적으로 이제 막 새로운 것이며 서구 제국주의적인 것인가?
5. 이슬람의 종교적인 관습들 가운데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무슬림 상황 가운데 있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적절하며 성경적인가?
6. 어디에선가 본인은 어떻게 과연 새로운 신자들이 신조(혹은 신경)들 가운데에 요약되어 있는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도록 할 것인가에 관하여 포커스를 두고서, 내부자적인 사고를 비평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7. 또 다른 것으로 이 글에 근본적인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이방인운동과 무슬림 가운데 제시된 내부자운동 사이에 진정 유사점이 있는가? 예를 들면, 한쪽은 이교도 다신론자들인 반면 다른 쪽은 급진적인 유일신론자들이다. 따라서, C-5 접근에 대한 어떤 비평들은 C-5 옹호가들이 주장하는 바 무슬림들이 모스크 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이교도 신전에 이방인 신자들이 머무를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도행전 15 장이 이방인 내부자운동을 옹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요지에 대하여 모두 응답하는 것은 본 페이퍼의 국면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바 있다. 현대식 사도행전 15장 회의에 의하여 이끌어 낼 수 있을 결론들을 다루고자 할 때에, 이 부분으로 돌아와 더 많은 것들을 언급하기로 한다.

진행과정: 무슬림들 가운데 내부자운동

이제 우리의 질문을 사도행전 15장으로부터 무슬림들 가운데 내부자운동에 대한 타당성에 대하여 분별하기 위하여 어떠한 진행과정이 사용되는 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본인은 이 과정이 사도행전 15장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발견한 것들과 거의 같다는 입장을 변호하고자 한다:

1. 그 진행과정은 복수의 회의와 상황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하나의 오랜 진행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 상황을 생각할 때에 한가지 질문을 야기시킨다. 즉, 누가 참여하여야 하는가? 오늘날 세계의 보안에 대한 그토록 많은 우려를 목전에 두고서 어떻게 그러한 광범위한 열린 토의를 할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 15 장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는 사도행전 15장 사건 그 자체에서 한 실마리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논란은 안디옥에서 분출되었다. 예루살렘에서의 토의는 명백하게 이방인 운동을 대표하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주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bridge people)만이 참여하였고, 그들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바울, 바나바, 베드로와 같이) 유대인들이었다. 그들 예루살렘에 있는 전 교회는 그곳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본인은 비슷한 점이 있음을 제안한다. 그것은 다양한 환경 가운데에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두고 진행하되 교량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주로 집중하는 그러한 과정을 말한다. 본인은 보안문제가 허락되는 한에서 가능한 한, 그러한 교량역할을 하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무슬림들을 포함해야지 단지 내부자운동을 주장하는 서구의 실천가들만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안한다.

2. 그 진행과정은 어떻게 무슬림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있는지 그리고 고넬료 사건과 비슷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적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베풀어진 기사들과 같은 것에 대하여 주의 깊게 귀 기울여야 함을 포함한다.
우리 자신의 사역의 경우, 그와 같은 사건들을 증거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은 우리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적과, 꿈과 환상, 그리고 그와 비슷한 현상들이 첫 번째 사도행전 15장 모임의 중요한 조각임을 안다. 진정 이 부분이 고린도후서에서(12:12절 참조) 바울 자신이 사도직분을 계속 변호하는 내용의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른 문화와 종교 가운데에서 역사하시는지(혹은 역사 하시지 않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을 보다 온전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본인의 이전 아티클을 참조하기 바란다: IJFM,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3. 그 진행과정은 내부자들이 직면하는 어려움과 핍박들의 경험에 귀 기울일 것도 포함하여야 한다. 이 또한 야고보에 의하여 사도행전 15장에서 입증된 정당성의 일부이다 (바울과 바나바를 참조하는 26절을 보라. 또한 고린도후서 11:16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에 기초하여 사도직을 변호한다).
4. 그 진행과정은 하나님 말씀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는 것을 포함하여야 한다. 이는 대표적인 참여자들로 이루어진 실제적인 사도행전 15장 형태의 모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지속적인 저술과 출판도 또한 이러한 진행과정을 이루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본인은 비록 그의 결론들과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테넌트 박사의 글을 성경적인 작업의 한 예로서 보며 그와 같은 일을 우리가 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할 수 있겠다. 그러한 작업은 이런 이슈들에 대하여 모든 각도를 대표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더욱 많은 선교학자들이 철저한 석의적(exegetical) 작업 가운데에 관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욱 많은 석의 내용들이 선교학 연구 가운데에 자라날 필요가 있다. 석의적이고 선교학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풍부한 분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a. 성경내의 비성경적인 자료들의 사용: 유다의 정경외 작품(apocryphal work)의 사용, 바울의 이교도 시들을 인용한 예 등.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코란을 사용하는 것과 그에 대한 평가에 도움을 줄 것이다.
b. 멜기세덱이라든가 좀 처지기는 하지만 이드로와 같은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대계 선지자들(prophets). 이들에 대한 연구는 무함마드에 대한 가능성 있는 이해의 평가에 도움을 줄 수 있다.
c. 통치조직과 용어 그리고 신약의 예수운동에서 발견되는 신학적인 관점의 다양성과 그 발전에 대한 연구. 예를 들면, 마가의 기독론은 요한의 것과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고, 행위에 대하여 야고보와 바울이 관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 다른 환경일 때에 바울의 생각과 표현이 변화를 보이는 사실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를 비교해 보라: 또한 에베소 교회에 사용하는 사고와 언어를 갈라디아 교회에 사용하는 것들과 비교해 보라.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의 정치구조를 디모데전서의 것과 비교해보라).

그러한 연구는 내부자운동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가능한 정치구조, 어휘, 및 신학적인 표현에 대한 융통성과 제한성을 탐구하도록 해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상황과 질문들을 다루어 가면서 성경의 보다 많은 부분을 적합하게 하고 적용함에 따라서 시간이 감에 따라 한 운동 내에 신학적인 표현과 이해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된다는 올바른 인식에 우리가 민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5. 마지막으로, 그러한 과정은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바와 같이 형제애의 정신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 상대방을 곤두박질 시키는 위기는 형제애의 모델이 아닐 것이다. 사도행전 15:1-5절은 보다 하나의 쟁론적인 마찰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우리가 모델로 바라보는 예루살렘 모임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보는 하나님의 운동으로 태동한 이방인 운동에 대한 존경을 실제적으로 시위하였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논쟁 가운데서 종종 경험하고 있는 것과 다른 점이다. 두 가지 예가 있다:
사역 초기에, 본인은 한 무슬림 배경의 동료로부터 다른 무슬림 종족집단 출신의 초기 신자들을 지역의 현지 교회(이는 주로 다른 종족집단으로 이루어진 교회임)로 데리고 오라는 권장을 받았다. 내 동료가 바라는 것은 그 새로운 신자들이 목사를 만나서 교회에 소속되도록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비록 본인의 개인적인 경향은 그것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내 형제를 존중하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목사는 물이나 차도 내어 놓지 않았다. 더욱이 일상적인 인사 조차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거의 즉각적으로 새 신자에게 질문하였다. 나에게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해보게. 그 새 신자는 당황하였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목사가 그는 아직 준비 되지 않았어 잘라 말하며 돌아 섰을 때에 그와 나는 실망하면서 자리를 떠야 했다.
이러한 예는 그 안에 수 많은 이슈들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구원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가정들). 그러한 상황과 문화에서 작동하는 다이네믹스 가운데에 하나가 크리스천 공동체와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 있는 커다란 적개심이었으며 그것은 크리스천들과 회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 가운데에도 이전되었다.
본인이 위에서 요약한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사전에 이루어진 오해와 편견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양측에서 서로에 대하여 동정적인 가정들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예는 보다 서구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온 것이다. 본인은 지난 10여 년 동안 무슬림 가운데 내부자운동에 대한 연구를 구상, 이행, 그리고 평가하는 일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작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영광을 가졌다. 무슬림 가운데에 믿는 자들을 포함한 우리 그룹은 연구의 필요들과 목표 그리고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개발하고 구상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운동 내 지도력의 목표는 그 운동의 지속적인 제자양육을 개선하는 방법을 단순히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출간되지 않았지만, 어떤 선교 지도자들 간에 조용하게 돌려볼 수 있게 하였다. 이후에, 우리는 이 사역의 결과들이 주요 선교저널에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슬펐으며 충격을 받았다. 본인이 슬펐던 이유는 아무런 사전의 협의도 없이 그것이 그렇게 쓰여진 것이었으며 그와 더불어 그 글의 전체 취지가 비난으로 추정된 사실 때문이었다.
만일 진실한 사도행전 15장의 진행과정이 가능 하려고 한다면, 담장 양쪽 편에 있는 모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그러한 형제로서 서로를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진정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라는 바울의 로마교회에 대한 훈계가 이러한 면에 가장 어울리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들: 무슬림들 가운데 내부자운동

여기에서 위에 요약된 그러한 진행과정의 결과를 선점하고자 하는 것이 본인의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글을 발표하는 우리들 가운데에 어떻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내부자운동에 대하여 반응할 것인가?라는 가정적인 질문에 대한 설명을 요구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본인은 사도행전 15장 연구가 이끌어낸 각각의 주요 질문들에서 언급된 즉각적인 생각들 중 어떤 것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무슬림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부자운동에 있는 무슬림들이 실제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도행전 15장에서 특별히 제기된 질문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의 문제이다. 본인이 알고 있는 한, 내부자운동을 비평함에 있어서 사실상 무슬림들이 구원 받는가 혹은 내부자로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사람의 비평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면서 이제 시작하고자 한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보면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본래 모임을 조장한 질문은 무슬림 내에 내부자운동에 가장 종종 부과되는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부자운동 패러다임에 대한 많은 비평들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은 절반 가량은 이와 같은 질문들인 것이다: 즉,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인 신학적인 최소한의 것들이 무엇인가?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인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이해인가? 대속적인 속죄함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능력인가?
사도행전 15장이 실마리들을 제공한다.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았으며 (15:8)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 (15:9).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며 알았다 (15:11). 그들은 우상숭배를 멀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러한 확증들 각각은 그들과 함께 하는 경험적 지식에 입각한 믿음을 내포한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사례로서 그 진술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여 오신 일들을 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 (심지어 그들이 성령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게 하셨다 (하나의 교리적인 형성이 아니라 심오한 도덕적인 변혁임).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을 포함하는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에 관하여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우상을 멀리하라는 요청은 그 열거한 항목 가운데에 가장 명확한 특정의 내용을 이룬다.
무슬림 상황에서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로, 구원을 점검하는 것은 오늘날 서구의 기독교에서 전형적으로 그런 것처럼 (특정의 신앙문구들로 명시되는) 지각을 중심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부터 내리고자 한다. 대신에, 사도행전 15장에 가정된 구원에 대한 점검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부어주심에 의하여 변혁되는 삶에 대한 점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위에 본인이 언급한 우리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던 것이다. 우리 연구는 신앙과 회심의 행동적이고 감정적인 차원들이 사실상 어떤 영역들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선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연구가 대상으로 하였던 운동에서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귀납법적 방법을 적용하여 성경공부 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계속되는 양육에 급진적으로 헌신되어 있었고 지금도 헌신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운동을 키워가고, 교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워가는 것이 근본적인 원리이다. 이것은 본인이 다른 상황들 가운데에서 이어지는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논의로 돌아가서, 본인은 지각적이고 교리적인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야고보서 2:19 이하)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당신 자신의 활동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지각적인 차원들에 대해서는, 만일 우리가 내부자운동을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적용하는 양상으로 이루어간다면 성장해 갈 것이다. 이것은 본인이 무슬림들 가운데에 일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경험해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상 내부자 사역에 대한 비평이 제기하는 대부분의 우려들 가운데에 우리가 위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실제적으로는 구원 자체에 대한 질문들이 아니라 내부자운동 가운데에 제자훈련이나 제자양육에 대하여 주어지는 지속적인 돌봄에 관한 질문들이 많다. 내부자운동에 대하여 제기되는 질문 대부분이 구원이 아니라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혹은 멕가브란의 용어를 사용하여 제자양육이 아니라 온전케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본인이 그 질문들을 경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무게를 갖는 것들이다.
본인은 모든 C-5옹호가나 실천가를 위하여 답변을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사역에서 본인이 말한 바와 같이, 내부자운동 가운데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성경의 대부분을 따라가면서 지도자들을 개발하는 진행형적인 과정을 형성시키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본인은 이 노력을 기술하려고 하였으며 그 안에 들어 있는 보다 자세한 주요 원리들은 다른 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역에서는 내부자운동이 모스크에 참석하고 다른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규칙적인 믿는 자들의 모임을 장려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성경말씀에 함께 젖어 들어가는 평생의 과정을 장려한다. 그러나, 아마도 알아야 할 중요한 점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과정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과정으로 보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부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 하에 내부자들의 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적용을 위한 질문 2: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최소한의 것들(minimums)과 문화적인 양보 사항들(concessions)을 포함하는 연합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15장은 답변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한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이 질문은 운동들 사이에 연합과 친교에 대한 것이다. 우드베리도 자신의 글에서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결론에서 그것을 내부자운동에서 언급해야 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룬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 이슈는 복잡하다. 우리가 사도행전 15장의 이에 대한 구절을 이슬람 상황에서 적용하고자 할 때에 두 가지의 간단한 답변을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의 가능성 있는 입장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새로운 몸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사역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무슬림들 가운데서 분리된 운동을 전개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어떤 성경본문들은 이점을 지지한다 (특히, 에베소서가 그렇고 갈라디아서 3장의 구절들도 그와 같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의 완전히 분리된 운동을 (종종 보안상의 문제로) 주장하기 원할지도 모른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19절 이하에서 스스로 묘사한 바와 같은 구절들은 사도행전 21:17절 이하에서도 그럴 수 있듯이 그와 같은 입장을 지지하는 데에 인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 둘 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예수께 향하는 분리된 운동에 대한 확증으로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으로라고 말할 수 있도록).
본인은 현실적으로 실상은 훨씬 더 복잡하며 그들 둘 다 진실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두 가지의 별도 운동이 태동한다는 입장에도 진실성이 분명히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신약의 많은 부분이 특히 바울 서신서들은 이들 운동의 분리된 상태(SEPARATENESS)에 의하여 야기되는 문제를 계속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관계하고 함께 먹어야 하는지의 이슈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언급한다. 이는 최소한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이 함께 규칙적으로 식사와 예배를 위하여 모였다는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본인은 나중에 이에 대하여 더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질문 안에 서 두 가지의 질문을 해보자.
첫째, 진정한 친교가 일어나기 위하여 그 양측에 요구할 수 있거나 아마도 필요로 하는 양보사항들은 무엇이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어떠한 상황 및 양식으로 연합의 형태가 갖추어져야 하겠는가?
이슬람 상황에서는, 사실상, 양보사항에 대한 이슈는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것의 정반대로 일어날 수도 있다. 무슬림 가운데 믿는 자들에게 연합을 위하여 음식에 있어서 양보를 하라고 요청하기 보다는 실제적으로 본인에게 있어서는 크리스천 배경을 가진 믿는 자들에게 돼지고기나 먹어도 되는 음식에 대한 구분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 의상을 드러나지 않게 입는 부분 및 어떠한 미팅에서 가능한 여성들과 구분하는 등과 같은 것에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연합에 대한 그러한 표현들을 갖는 환경이나 상황들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 직접적인 유사성을 찾는 것은 더욱 복잡한 일일 것이다. 신약성경상의 초대 예수 운동은 확실히 핍박과 보안의 위험성을 경험하였지만, 그 역동성의 속성은 오늘날 무슬림 세계와는 매우 달랐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회중들은 사실상 혼합된 형태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방인들 혹은 유대인들 믿는 자들 가운데 분리된 운동들을 볼 수 있는 성경본문들이 있다. 사도행전 21:17절 이하는 그러한 유대인의 상황을 묘사한다. 분명 많은 회중들 가운데, 유대인 믿는 자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로서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이방인 믿는 자들과 함께 동일한 미팅에서 함께 모이는 것으로 인하여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자신들 안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미팅들은 오늘날 무슬림 세계 내에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위험성을 띄지는 않는다. 또한 사도행전 15장의 모임은 우리가 오늘날 무슬림 가운데에 믿는 자들을 포함하여 그와 같은 미팅을 한다고 할 때에 닥칠 수 있는 그와 같은 위험성을 갖지는 않는다. 따라서, 가시적으로 섞인 형태의 모임을 가짐으로 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언제나 올바른 접근을 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연합은 여전히 양보사항들을 요구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무슬림 상황은 처음 세기의 상황과는 매우 다르다. 따라서 연합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은 매우 다르게 보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어떤 면에 있어서 보다 상반되고 어려운 질문으로서,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최소한의 것들(minimums)에 관한 것이 있다. 사도행전 15장은 새로운 이방인 운동이 우상숭배와 음행을 멀리해야 할 것임을 주문하였다. 그렇다면 무슬림, 내부자운동 상황을 고려할 때에 그와 같은 유사점은 무엇인가? 본인은 이제 신학적인 최소한의 것이 무엇일 수 있겠는가 대한 질문에 집중하고자 한다.
오늘날 내부자운동에 관하여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하여 고려해 볼 때에, 이제는 내부자운동이 4세기와 5세기 경의 신조들에 부합된 기독교 신앙과 접합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하여 한 4~5년 안에는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는 말해야 할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삼위일체의 정의들 또는 아마도 니케아의 철학적 뼈대 가운데에 있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에 대한 이해와 같은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 온 것 같다. 그와 마찬 가지로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의 무오성이라든지 몇 가지의 신앙고백적이고 신조적인 표현과 같은 것을 중요한 주제라고 말하여 왔다.
이들이 과연 중요한가? 물론 그렇다. 구원을 위한 필수인가? 그것은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울 수 있다.
본인이 말하는 것이 신조들이 설 자리가 없다거나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조들은 초대 신자들과 매우 다른 상황들에서 그 문화적 상황과 당 시대의 질문들을 성경에 기초한 신앙의 명확한 표현들로서 어떻게 개발하였는지에 대한 선한 모범이며 가치 있는 예들이라는 것이 본인의 견해이다. 이것이 모든 내부자운동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고 타당한 하나의 과업이며 그것은 단순히 신조들을 번역하는 것으로서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지도자들이 상황적이고 문화적인 질문들을 다루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할 능력을 갖도록 성장하는, 내부자운동 내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진행과정이다. 본인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로 특수한 문화적인 상황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 성경신학을 발전시키도록 이끌어 가시는 과정에 대한 인식을 요청하는 바이다. 그러한 과정은 우리가 진정 그 경로를 밟아가기 원하는 한 인내의 실천을 요구한다. 또한 등장하는 지도자들이 그 과정을 이루어가도록 그리고 보다 안이한 것이나 외부자들로부터 이미 준비된 답변들에 안주하지 않도록 열심히 격려하는 근면을 요구한다.
그러면, 최소한의 것이 있는가? 이제 하나님에 의하여(BY)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님에 대하여(ABOUT) 얼마나 많이 알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여기서 본인은 우리가 성경 가운데에서 발견한 것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즉, 그것은 매우 솔직하게 다시 말해서 본인이 그것을 구원이 시작하는 지점들(saving starting points)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응답들과 이해들 가운데 되돌아가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본인의 입장은 신약의 각 책이 그 자체의 상황안에서 읽혀지는 원리와 그것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은 저자의 고유한 관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전 신약의 정경됨이 옳다고 주장한다. 즉 다시 말하면, 복음서, 야고보서 혹은 요한이 기록한 모든 것에 대하여, 예를 들어 마치 바울을 정경 안에 있는 정경인 것처럼 보고 그 모든 것들을 바울신학적인 뼈대 속에 맞추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각 영감을 받은 저자의 고유한 관점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계시를 단지 하나의 평면 거울과 같이 주신 것이 아니라 다이아몬드의 많은 면처럼 그렇게 전체적인 정경으로 주셨다.
그러면 다시, 최소한의 것은 무엇인가? 그 어떤 성경적인 구원을 시작하는 지점들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15장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할 때에 그들이 구원받고 있었음을 확증한다. 또 다른 신약의 확증은 그들이 예수를 주님(Lord)이라고 알게 되었을 때에 구원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의 이름 안에서 회개와 죄 사함을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속죄함을 얻었다고 하고, 혹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다고 하며, 혹은 그들이 입으로 시인(confess)하였다고도 하며, 혹은 그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닿기 위하여 나아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는 구약의 핵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요약하신 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위에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해석(hermeneutic)에서 성경말씀은 다음 세 가지의 주된 것을 가리킨다:

1. 예수님 자신과 사역(죽으심과 부활).
2. 회개와 죄 사함의 선포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들어감.
3. 성령을 부어주심(누가복음 24:44-49을 보라).

이러한 것들은 어떤 사람으로 간단하게 그 신앙에 대한 시험(test)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그 제자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가? 그들이 죄를 회개하였는가?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가?
이들 모두는 필수적인 것들로서 또 다른 질문을 요구한다. 그러면,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무엇에 기초하는가? 누가 그 권위를 가지는가? 사도행전 15장은 이방인들에게 (아마도 모든 이방인들에게 심지어 우리를 포함하여) 네 가지 것들에 대하여 멀리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그것은 사도들과 장로들로 이루어진 회에서 결정하였다. 오늘 날 우리 가운데에 (만일 우리가 이방인들이면) 그 네 가지 가운데에 두 가지 것에는 그리 관심을 두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은 우상숭배와 음행은 여전히 매우 타당한 우려들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에 의하면, 피 또한 그들 기본적인 것이요, 필수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에 가서 피소시지 먹는 것을 (종교적이고 영적 차원에서) 거부하겠는가? 본인의 요지는 우리가 거의 직관적으로 우리 자신이 이 구절을 어떻게 그리고 언제 순종할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에게 요구할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비무슬림으로서 본인이 바로 언급한 바와 같은 동일한 종류의 문화적 결정을 하여 그들을 신뢰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들 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질문

우리는 사도행전 15장 본문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무슬림 가운데 내부자운동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 토의의 수면 밑에는, 본인이 마무리하기 전에 돌이켜보고자 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이 잠복해 있다.
테넌트 박사는 이전에 본인이 참조한 글에서 또 다른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내부자운동이 과연 진정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는 C-5 동조자들이 사용하는 많은 성경 구절들을 언급하며 사실상 그들 - 최소한 그가 대화한 사람들이 정리해 놓았다고 하는 것들이 내부자 사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본인 또한 위에서, 신약에서 어떤 경우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미팅을 가진 것을 알게 되며 이것은 어떻게 내부자운동에 대한 본인의 변호에 들어맞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또한 위에서 사도행전 15장이 이교도 이방인 상황을 다루고 있고 따라서 그것은 그들 이교도들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회개하라고 촉구하기 때문에 무슬림들에 대하여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바와 같은 내부자운동으로서 이방인 내부자운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할 것인가? 본인에게 남겨진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답변을 구해야 하는 방향들에 대하여 단지 요약하는 정도로 하고자 한다. 이에 관련하여서 몇 가지 연구할 풍성한 영역들이 있다:

1. 첫째, 신약이 이교도 이방인들 가운데 어떠한 종류의 내부자운동이라도 권장하거나 묘사한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설명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에 이르는 부분을 특별히 그러한 관점을 염두에 둔 선교학적인 질문을 지니고 철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편지를 언급함이 없이 음행과 우상숭배를 금하라는 (고린도전서 10:6절 이하) 그 편지의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필수적인 것들에 대하여 간결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음식에 대한 입장이 그 편지에 있는 것과 매우 동일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울이 강하게 먹지 말라고 권면하는 그 이유는 약한 자들이 먹으려고 하다가 그 양심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바램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8:7-9). 그러나, 우리 관점에서 볼 때에 여기서 더 나아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8:10절에서 우상의 신전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를 언급하면서 매우 이상한 코멘트를 하고 있다. 그 구절에서 바울의 염려는 그 행동 자체 혹은 그 안에 어떤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은 그 형제의 행동(action)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의 비평은 그것이 한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그와 같은 방법으로 먹도록 조장함으로써 그가 양심을 더럽힐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본인이 여기서 말 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 본문이 시장에서 고기를 사거나 개인적인 장소에서 그것을 먹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우상의 신전 안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우상숭배에 관여하지 않는 한 이방인 형제를 언급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과연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본인은 지금으로서 단지 이것이 이방인 가운데에 믿는 자가 여전히 자신들의 종교적 유산의 일부 안에 있는 가능한 한 예라고 말하는 정도까지만 준비되었다.

2. 사마리아 사람들(요한복음 4장,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몇몇 참조들). 유일신교이기는 하지만, 유대교 신앙의 이단적이고 아마도 혼합주의적인 분파로서 이는 일종의 비-이교도적인(non-pagan) 상황 가운데 내부자운동의 이슈를 탐구하기 위한 적절한 기회를 제공한다. 본인은 다른 어떤 곳에서 사마리아의 경우가 이슬람 내에 내부자운동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 논의한 바 있다.

3. 이교도 이방인들과 이단적인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정통 유대교에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바리새파 가운데 예수께 향하는 하나의 운동이 있었음을 다시 알게 된다 (사도행전 15:5은 그 분명한 예이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1:17 이하와 수천의 율법을 준수하는 신자들에 대한 묘사는 바리새인들을 포함할 것이다). 왜 이러한 예가 중요한 것인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서로간에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역은 바리새인들의 관습과 특별히 그 신앙에 대한 수 많은 비평을 포함하고 있고 특히 일반적으로 토라(율법)를 준수하는 것에 대한 매우 복잡한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사(sacrifices)에 순종할 것을 명하시지만(나병환자의 경우) 그와 함께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것을 천명하신다. 그는 율법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고는 명백하게 그 입장을 밀쳐내는 것 같은 가르침을 내어 놓으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보면,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But, I say to you뀛)라는 말씀을 참조하라). 여기서 요점은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당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여러 가지의 수준에서 비판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내부에서(within) (그리고 다른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에서) 예수께 향한 운동이 있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비판을 하셨던 종교운동 내에서 예수께 향한 진정한 운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준다!
이와 관련한 마지막 예는 사도행전 초기 장들에서 예루살렘에서 예수께 향하는 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은 다른 곳에서 사도행전 2장과 3장의 상황 가운데에 신자들에 의하여 지속되었던 성전에 나가는 일은 그 성전 지도자가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하고 예수님의 메시아라는 주장을 부인하였던 직후였다는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모스크에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다시,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에서 믿는 자들을 신자들로서 지속되어 온 교제를 위하여 만날 것을 격려하고 그 문화의 공식적인 종교적 행사 밖에서 가르침을 권장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사도행전 2:41-47절의 예처럼).

내부자운동과 변혁(Insider Movements And Transformation)

우리가 사도행전 15장 연구와 무슬림 내부자운동에 그것을 적용하는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여러 가지의 관점에 대한 시사거리들이 있지만 아직은 직접적으로 그것에 대하여 진술하지 않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한가지 가정에 집중하고자 한다.
본인은 분명히 내부자운동 혹은 C-5 접근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이슬람 내부에서 예수께 향하는 진정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변호한다고 해서 본인이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하는 바와 같은 이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바라는 바 순수하고 정통적인 양식 가운데에 있는 이슬람이 진실(true)하다는 것도 아니며 한 믿는 자가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인용하였던 사례들이 이슬람 내부의 온전한 예수께 향하는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하에 내부에서 그것이 적용됨으로 말미암아 변혁과 진정한 개혁을 가져올 것임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무함마드, 꾸란, 이슬람 기도(숄랕/ sholat)의 가치, 무슬림이라는 단어의 의미, 예수님의 속성, 알라의 특징, 그리고 그 외에 수 많은 이슬람의 신앙과 삶의 요소들에 대한 관점들이 예수께 향하는 그러한 운동 내에서 그 운동을 통하여 변하게 될 것이다.
꾸란, 무람마드, 하지, 샤하다의 급진적인 재해석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을 예수님 열쇠(Jesus Key)라는 렌즈를 통하여 모든 것을 재해석하여 유대교 내에서 한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셨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예수 열쇠를 그들의 시와 찬양곡을 해석하는데 적용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들 급진적인 재해석들은 많은 심지어 대부분의 유대인들이나 아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정통적 다수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예수님이나 바울이 틀렸다는 것을 전혀 입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무슬림내 내부자운동의 신학이나 실천이 대부분의 경우에 소위 정통 혹은 진짜 이슬람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초대의 신자들처럼 분명하게 그러한 내부자운동이 모스크와 다른 이슬람 기관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제거되는 그러한 때가 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 운동을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거나 그러한 운동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조명으로 전개된 (예를 들자면) 꾸란의 본문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부적절 하다고 전혀 증명하지 않는다.
맺는 말

그와 같은 내부자운동을 하나님께서 무슬림 가운데 오늘날 다른 것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것들 가운데에 하나로서 그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에 대한 진위성에 대한 실제적인 시험은 선교학자들의 글이나, 합의 및 동의 혹은 합리적인 주장이나 논의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본 바와 같이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진정한 예수 운동을 주장하는 그 어떠한 운동에 대한 실제적인 시험은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들어 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역사하심의 과정 가운데에 성령님의 부어지심으로 말미암는 깨끗하게 되는 심령들과 삶으로 말미암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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