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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학자료 > 2008-02-21
박준석 6496
네비우스가 중국에 끼친 영향
기독교의 중국 선교 역사
A. 중국선교의 역사

중국선교의 역사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구약의 이사야 시대에 중국과 유대인의 교류가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자는 기원 후 50년경 도마시대에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가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다.
선교학자 전호진 교수는 중국의 선교를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 몽고 때의 서구선교, 16세기 예수회 선교, 그리고 19세기 개신교 선교이다. 본 장에서는 위와 같은 구분에 의하여 중국선교의 역사를 개관한다.

1.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

중국의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1629년에 발견된 대진경교중국유행비석(大秦景敎中國流行碑石)이다. 이 기록에는 중국에 처음 기독교를 전한 사람은 아라본(阿羅本, Alopen)으로서 대진(大秦) 당나라 장안에 처음 도착하여 당시 태종 황제로부터 환영을 받고 궁중 도서관에서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그후 당태종은 자신이 직접 이 종교에 대하여 배운 뒤, 다음과 같이 포교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고 심오한 신비성을 풍부히 가지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임으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 태종에 이어 고종 황제의 통치기간에도 경교는 더욱 견고한 지위를 얻어 당시에 국내 13도 358주에 경교 사원을 하나씩 건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죽은 후 불교의 숭배자인 즉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경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예종, 현종(712-756)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기존의 종교인 유교와 도교가 경교의 급속한 포교에 대한 견제로서 비롯되었다.
열열한 도교신자인 무종 때에 이르러 경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이 박해는 불교에 대한 박해로 시작하여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경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때 많은 경교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는 등 점차로 경교는 쇠퇴하여 갔다.
당시의 경교 신앙은 전통 기독교의 교리와는 다른 교리체계로서 이단의 색채가 농후하다. 경교비의 내용을 보면 창조, 타락, 메시야의 출생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하여는 언급이 애매하며, 신앙은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산 자를 번성하게 하며 죽은 자를 기쁘게 한다고 하며, 신자의 덕으로서는 사랑, 자비, 친절, 평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매 7일마다 성찬식을 행하며, 동쪽을 향하여 절하고 예배 시에는 목탁을 쳤다고 한다.
라토렛 교수는 경교 선교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경교는 토착화에 실패하여 계속 외국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원주민 지도자의 양성에 실패하였다.
둘째, 당시의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갈 당시에는 로마의 국가종교나 철학이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경교의 경우에는 불교가 이미 사람들의 영적인 공백을 메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교는 오히려 불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었으므로 경교의 포교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셋째, 경교의 선교사들이 본국의 교회와 선교 본부로부터 너무 멀리 있었으므로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경교는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2. 몽고 때의 서구선교

두 번째 단계인 몽고 때의 서구 선교는 1246년 교황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파송된 선교사 아곤(Agohn)은 기독교 신자에 대한 몽고의 공격을 항의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였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그 후 계속된 몽고 시대의 선교는 정치성을 띤 무성의한 선교였으므로 큰 결실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몽고의 쿠빌라이가 로마 교황에게 종교와 예술에 있어서 탁월한 선교사 100명의 파송을 요청하면서 그렇게 해주면 많은 백성들이 개종할 것이라고 했으나, 교황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선교보다는 정치에 목적을 두었으며 몽고군의 사정을 파악하는데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결국 몽고시대의 선교는 약간의 교회를 설립하고 6,000여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성공하였을 뿐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 교회는 몽고족의 패배와 명 왕조의 설립으로 경교와 함께 단명하였으며 결국은 경교도 로마 카도릭도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3. 16세기 예수회 선교

종교개혁 이후 30년 간의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천주교는 많은 내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가톨릭 내에서 많은 경건 파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예수회이다. 예수회는 1540년 교황의 인정을 받고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서구 여러 나라에서 천주교인들의 영적, 도덕적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교황의 명령이면 세계 어디든지 생명의 아끼지 않고 선교사로 헌신하였는데 그 중에 교황 니콜라스(Nicholas) 4세의 파송을 받은 존 코르비노(Jonn Corvino)신부가 1293년 인도를 경유하여 중국 연경에 도착하므로 예수회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 후 많은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그들 중 중국선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마태오리치이다. 그는 중국선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중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중국의 풍습과 환경, 그리고 중국인의 기질을 연구하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의 환경에 적응하는 일과, 또 사대부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서도 항상 조심하여 조정의 인정을 받았으며 결국 대명제국의 신종황제(神宗皇帝)로부터 북경을 위시하여 전 중국에 자유로이 선교할 수 있는 허락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태오리치는 복음전도의 과정에서 생기는 문화 충돌을 지나치게 회피하여 중국을 기독교화하기 보다는 복음을 중국 화하는데 전력하였으므로 중국인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혼합주의에 대한 프랜시스코 수도회의 고발로 인하여 교황청의 불법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천주교는 신자의 제사참여를 금지시킴으로 중국 임금의 노를 불러 선교사가 추방되거나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에서도 19세기의 활발한 선교는 천주교회가 중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토착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4. 19세기 개신교 선교

중국선교의 제4단계는 19세기 초에 시작된 개신교 선교이다. 이 때의 선교는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므로 대포를 따라 들어온 강압적인 선교였으므로 이 일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선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대한 선교의 세기'인 19세기 서구 기독교는 경쟁적으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중국은 서구선교의 경쟁 장이 되어버렸다. 이때 중국 선교사의 수는 무려 1,300명이나 되었으며 1900년에는 약 2만 명에 달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복음전도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문화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1899년까지 선교사들은 중국에 60여 곳의 병원을 세우고, 1천여 곳의 초등학교와 70여 곳의 중등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당시 기독교와 함께 계몽주의, 무신론 사상, 진화론 등도 들어와 중국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므로 기독교 선교에 많은 도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은 지금까지의 교파선교를 연합선교로 바꾸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유사 기독교운동 혹은 반 기독교운동 등이 일어나 교회에 큰 타격을 가했는데 이 때 190명의 선교사가 순교하게 되고 수천 명의 신자가 죽거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유사 기독교 운동이란 19세기 중엽 홍수전이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처하면서 농민반란을 전개한 운동이며 반 기독교 운동이란 1900년에 일어난 반 외세 운동인 의화단 사건을 말한다.
또 공산당이 조종하는 반 기독교 운동도 교회에 큰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결국 중국의 기독교는 계속하여 민족주의, 과학주의, 계몽주의,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시달리다가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고난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B. 개신교의 중국선교

개신교 중국선교를 인물을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개관하여 본다.

1. 초기의 선교사들

1) 로버트 모리슨
개신교의 중국선교의 시효는 웨슬레의 부흥운동이다. 감리교의 탄생과 부흥은 다른 교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각 교단들은 복음의 열기를 해외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1799년 4월에 "아프리카 및 동양 선교협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for Africa and East)를 탄생시키고 선교사들을 각국에 파송하였다. 1807년 런던선교협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
)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이것이 개신교 중국선교의 시작이었다.
1807년 6월에 약관 25세의 모리슨은 광동(廣東)에 상륙하였으나 당시 중국사회에는 영국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어 선교활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는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 자리를 얻어 미국인으로 행세하면서 극히 제한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모리슨은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27년 만인 1834년 8월 1일, 52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약 10명의 중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뿐이다.
그러나 모리슨의 위대한 업적은 주로 문서선교에 있다. 모리슨은 1811년 신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였고, 1823년에는 윌리암 밀룬(William Milne)과 더불어 신구약 전부를 번역하여 이를 신천성서(神天聖書)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 후 화영사전(華英辭典)을 편찬하는 등 10여종의 한문 서적을 간행하므로 중국선교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 외에 그는 의료사업에도 초석을 마련하였다.

2) 헨리 메드할스트
모리슨을 잃은 런던 선교협회는 그를 계승하기 위하여 헨리 메드할스트(Walter Henry Medharst 1796-1857)를 중국에 파송하였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헨리는 1835년에 광동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8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중국어도 속히 배워 한역성경을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정정하였으며 전도지를 만들어 배를 타고 중국연안을 돌며 전도하였다. 이 때는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 험악한 분위기였으며 특히 외국인에 의한 중국 내륙선교가 금지된 상황이었는데 헨리의 20년 간의 선교활동은 중국 전역에 복음이 전해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데이빗 아빌(David Abeel 1804-1846)과 브릿지멘(Elijar Coleman Bridgman 1801-1861)
미국의 중국선교는 영국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후에 교회가 부흥되자 선교의 열기가 고조되어 1829년 미국외지선교협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가 조직되었고 이 협회에서 데이빗 아빌과 브릿지멘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두 사람은 1829년 10월 14일에 미국을 떠나 다음 해 2월 25일에 광동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으며 그 중에서 특히 브릿지멘의 활동은 의욕적이었다.
그는 중국지식 보급회(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ge in China)의 서기로, 모리슨 교육회(The Morrison Education Society)의 총무로, 또 의료선교협회(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중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글(The Chinese Repository)을 20년 간이나 씀으로써 중국선교현황과 현지사정 뿐만 아니라, 중국의 법률, 습관, 생활양식, 역사와 문학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공헌하였다.
이와 같은 초기의 중국선교는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되었으며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전의 가톨릭 선교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선교에 임하였다. 그들의 선교는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첫째는 선교의 기초를 마련하고 문서선교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번역하는 일, 사전을 편찬하는 일, 중국의 문화를 알리는 일, 그리고 전도문서를 작성하여 전파하는 일이 그것인데 이러한 일은 중국선교에 대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둘째는 의료 사업과 교육사업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열악한 중국의 의료상황에서 많은 무료 의료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 학교도 세워서 교회지도자의 양성과 일반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셋째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과거 중국정부에 밀착했던 로마 가톨릭이 정부의 정책변화에 따라서 동요하였던 전철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는데 서구 제국주의와 중국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가 서구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2. 네비우스의 선교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네델란드계 미국인으로, 1861년 장로교 해외 선교부(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 의 파송을 받아 중국 산동성에서 사역하였다. 네비우스는 일찍이 중국 선교에 있어서의 자양, 자치, 자전을 강조하였으며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자신이 속한 교단을 확장하기 위하여 채택한 라이스 크리스찬 제도, 신앙 고백 자 월급제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네비우스는 또한 단순히 선교 자체에만 치중하지 않고 선교방법론의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때까지의 선교사들은 교회개척이나 의료봉사, 또는 교육사업에 몰두하여 선교자체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였으나 네비우스는 선교이론을 구체화하였다.
네비우스의 선교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상류계급보다는 근로계급을 전도하는 것이 좋다.
② 부녀자들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찬 소녀들을 교육하는데 힘쓴다.
③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크게 효력을 낼 수 있다.
④ 장차 교역자는 기독교 학교에서 배출한다.
⑤ 의미가 명확한 성서를 주도록 한다.
⑥ 모든 종교서적은 외국어로 쓰지 말고 자국어로 쓴다.
⑦ 자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⑧ 토착인을 이용하여 전도하게 한다.
⑨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와 친숙하게 함으로 전도해야 한다.
이러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평신도의 활용, 성경중심의 교회, 교회의 자립과 토착화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는데 신학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는 것과 학문적인 훈련을 경시한다는 것, 자립을 너무 강조한 결과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경제적인 자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물질주의적인 풍조에 젖기 쉽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토착교회를 위하여 좋은 선교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선교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으며 따라서 채택되어 실행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3.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에서 출생하여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이며 약사였던 그의 아버지 아래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나 17세에 회심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목표를 중국 선교에 맞추고 그 일을 위하여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8세에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런던 병원의 수련의가 되어 선교사로서의 혹독한 훈련에 돌입하였다.
테일러가 중국으로 가기 위한 문은 갑자기 열려졌는데 중국에서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 절정에 이르자 그 동안 테일러를 후원하던 중국 복음화 선교회는 테일러가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즉시 중국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1853년 9월, 테일러는 21세의 나이로 중국을 향해 떠나게 되어 1854년 이른봄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중국에서 다른 선교사들의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된 테일러는 그 후 런던 선교회 지역을 떠나서 판자촌으로 이사하였으며 올바른 선교 방법은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인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테일러는 자기의 머리 색깔을 검게 물들이기 위하여 암모니아수를 사용하다가 실명할 뻔하기도 했다.
한편 테일러를 지원하던 중국복음화 선교회의 지원금은 최소 생활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 적은 데다가 송금도 일정치 않았으며 또한 선교회 측은 테일러의 이와 같은 선교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테일러는 선교회와 3년 동안 서로 불편한 관계를 가져오다가 1857년, 정식으로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탈퇴하게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영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한 달에 100만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라는 테일러의 호소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어 많은 후원자를 모으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국 내지 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 독특하게 조직되고 운영되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어떤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노동자 계급에 의존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 목회자들로서는 중국 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지원자를 선택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의 다른 선교 단체와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데도 유익하였다.
② 선교 본부를 중국에 두도록 하였다. 테일러가 중국 복음화 선교회에서 일해 본 경험을 통하여 볼 때, 선교회 본부는 중국 현지에 두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야만 선교사들의 모든 필요를 제때에 채워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③ 자신이 선교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선교회의 책임자가 되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이 요청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직분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④ 중국 내지 선교회는 모든 필요를 인간적인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또한 인간적인 도움을 호소하는 것도 금하였다.
내지 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사들에 비하여 비록 세상적인 학식은 적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탁월하였다. 그들은 약탈과 위험을 개의치 않고 중국 내지에 들어가 헌신적으로 선교하였으며 이 일은 중국인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선교에 임하였다.
수억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 채 죽어 가고 있다. 매 시간마다 1천명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만약 1천명의 복음 전파자를 확보한다면, 그리고 이들이 매일 50명 내지 200명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3년 이내에 모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테일러는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데 주력하기보다는 빠른 시간 안에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는데 목적을 두었는데 이러한 전략은 그대로 실천되지는 못했지만 중국 내지 선교회가 중국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882년까지 내지 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회가 설립 된지 30년이 경과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소속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헌신하기에 이르렀으며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최대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C. 중국선교의 결과

첫선교사 모리슨이 1807년에 도착한 후 7년 만에 첫 세례교인을 얻었고, 25년 만에 10명의 신자를 얻었으며 100년 후에는 13,000명이었던 것이 1949년 공산화되기 전에는 7,80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아더 글라서는 그 당시의 중국교회의 현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산정권이 선교회들을 중국에서 물러갈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1949년까지, 중국의 어느 방향으로든지 줄을 쭈욱 그어 놓고 볼 때, 평균 20 내지 30마일마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서를 믿는 복음적 교회가 하나씩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세례 받은 개신교도들이 약 100만 명쯤 있었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 수효의 거의 3배에 달하였다.

정확한 수효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공산당 혁명 직전의 중국의 개신교도의 숫자는 대략 100만 명 이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후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모든 선교사들은 남김없이 추방되었으며, 특히 문화혁명은 교회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시기에 중국선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공산당 혁명 후 50년이 지난 현재, 중국 내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형태는 대체로 다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삼자교회인데 이 교회는 종무국이라 불리는 정부기관의 책임과 지도 하에 있는 공인된 교회이다. 문화혁명 이후 다시 문을 열게 된 삼자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현재 약 2,000여 개의 삼자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삼자교회의 문제점은 그것이 순수한 기독교라기 보다는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등의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둘째 형태는 가정교회이다. 이 가정교회는 중국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하는 불법기관으로서 언제라도 정부의 탄압을 받을 수 있는 비공인 교회이다. 가정교회는 1950년대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10배 20배의 급격한 증가를 보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이며 성령의 역사였다. 그리고 가정교회의 대부분은 삼자 교회가 거의 없는 농촌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도시의 경우에는 삼자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소수의 학생들과 전문 직업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정교회의 숫자는 대략 20만여 개로 추정하고 있는데 가정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의 80%가 농민이요, 90%가 비 지식층이라는 점이다. 농민들은 대부분 문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정교회 안에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90%에 달한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들은 미신적인 방식을 버리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성경을 구입해서는 붉은 보자기로 싸서 보관하였다가 병자가 생기면 병자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또 밖에 나갈 때에도 몸에 지니고 나가는데 이렇게 하면 성경이 마귀를 쫓아 사람들이 평안하도록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국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개인적인 신앙형태인데 이들은 삼자교회에도 가정교회에도 가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신앙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의 내용이 어떠한 모습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랜 신앙지도의 단절로 아직까지 건전한 신앙을 가졌을 것이라는 데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중국에 있는 기독교 신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자교회 발표로는 330만 여명이며 비공식 집계로는 약 3천만 명에서 5천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Ⅳ. 문화적 접근으로 본 중국 선교 고찰

개신교의 중국선교는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를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중국인들을 사랑하여 복음을 들고 그곳에 갔으며 생명을 바쳐 헌신했기 때문이다. 넬슨 박사는 선교사들의 공헌을 이렇게 말했다.

비록 많은 실수를 하긴 했지만 서양 선교사들은 다른 문화권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했고, 많은 다른 나라들 안에 교회를 세웠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비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역경, 고난, 질병을 견뎠으며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라토랫 박사는 복음전도 외에 구체적인 서구 선교사들의 공로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① 기독교 공동체의 높은 도덕적 표준들은 중국인들에 무엇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다..
② 중국의 건설적 혁신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중국인은 기독교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③ 새로운 학문에 대한 처음 대다수의 교재들은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었으며 국립과 사립학교의 교사들 중 대부분은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수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④ 선교사들은 서구의 여러 학문을 신속하게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선포했다.
⑤ 윤리적 표준들을 보강하고 퇴폐적인 풍조를 몰아내고 윤리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⑥ 개인의 존엄성을 고양시켰다. 버려진 여아나 거지 소년, 실직한 품팔이나 아편 중독자, 문둥이나 악당, 그 누구나 구원의 가치가 있는 존귀한 사람임을 알게 하였다.
⑦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여 기독교인들에게나 비기독교인들에게나 윤리와 하나님과 종교적 생활에 새로운 개념들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성경이다.
⑧ 도교, 불교, 유교 등의 종교들에 강력한 영향을 주어 중국인의 혼합주의적 종교생활에 새로운 면을 소개하였다.
⑨ 중국을 서방 세계에 해석하고 소개한 일이다. 중국연구에 있어서 여러 세기에 걸친 선교사들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들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쏟아 부어진 막대한 선교자원과 긴 선교역사에 비하여 그 선교적 성과가 전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과 1949년 공산당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축출 당한 사실은 중국선교가 결코 성공한 선교라고는 말할 수 없게 한다. 매년 6,500명의 선교사가 150년 간 투입되어 얻은 결과가 단지 75만의 교인을 얻는데 그쳤다면 그 결과는 흡족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1941년부터 10년간 중국내륙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아더 글래서(Arthur F, Glasser)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우리 서구교회들과 선교회들이 아시아에서 별로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자각한다. 우리가 아시아인들을 좀더 성서적으로, 좀더 충실하게 섬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중국선교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인 요인과 경제 사회적인 요인, 또 신학적인 요인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문화적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중심이 아니라 복음을 받는 자의 편에서 적절한 전달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 인류학적인 연구와 적용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은 중국의 문화적 장벽을 과소평가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를 습득하는 일, 또 성서를 번역하는 일, 그밖에 가벼운 선교전략에 대한 노력은 지대하였으나 그 문화 자체를 연구하는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선교사들은 중국의 문화에 대하여 더 많은 이해를 한 후 중국선교에 착수하여야만 했다.
이 장에서는 개신교의 중국선교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평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평가의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마련하였다. 첫째, 중국 선교사들이 문화에 대하여 선교학적으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둘째, 선교사들에게 피선교지인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었는가? 셋째, 피선교지에서의 복음과 문화의 충돌을 적절히 대처하였는가?

A. 자문화중심주의(Cultural Ethnocentrism)

선교사들의 잘못된 문화이해는 문화적 우월감으로 인하여 서구문화를 중국에 심으려고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서구의 문화가 중국문화에 비하여 월등한 문화라고 믿었으며 또한 서구문화를 이식하는 것이 곧 기독교 선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문화적 우월감

선교학자 바빙크는 모든 선교사는 자신의 생활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선교지로 가지고 가는 선교사 자신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교사는 어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선교사들은 대체로 서구문명을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낮추어 보는 단문화적 시각(Mono Cultural Perspective)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 가운데는 서구식의 사치하고 풍부한 생활을 그대로 현지 인들에게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주택에 서양식으로 담을 두르고 잔디를 심은 넓은 정원을 가꿈으로서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물론 허드슨 테일러와 같은 선교사는 중국인의 관습을 많이 채용한다는 생각으로 중국인의 복장을 하고 머리를 까맣게 물들였으며 선교사촌을 떠나서 중국인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았다는 것과 내지 선교회 소속의 많은 미혼 선교사들이 내지에서 최저 생계비로 부녀자들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예외적인 일이지만, 이들도 선교의 한 방법으로서 이와 같은 생활을 했을 뿐, 중국의 문화를 존중했다는 증거는 없다.
많은 중국선교사들은 몇 가지 중국인에 대한 예절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중국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중국의 것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것을 중국에 주는 일에 몰두하였다.
43년 동안 중국선교사로 사역한 윌리암스(S. Wells Williams)는 노골적으로, 중국인이 비겁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하는데 무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잘못된 문화인식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배척하고 복음을 향하여 문을 닫게 하였다. 사실 중국사람들의 기독교 저항운동은 복음 그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는 선교사들의 서구문화에 대한 우월 의식과 선교방법에 대한 저항이었다.
2. 기독교와 서구문화의 혼동

글레서는 중국선교의 실패원인 가운데 하나를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서구식 기독교를 제시한 것과 유교문화의 진가를 인정하고 이용하려는 자발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곧 서구의 문화와 동일시했으며 따라서 중국의 그것은 마땅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귀주교안, 천진교안, 대족교안 등이 문화적인 문제, 즉 전통제례의 거부에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이를 대체할 만한 아무런 대체물도 없이 중국의 문화적인 전통을 거의 전적으로 무시해 버렸으며 대신 많은 문화사업에 열을 올렸는데 그 결과 1860년부터 1890년까지 개신교는 중국에서 70여종의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1899년까지 60여 곳의 병원을 설립하고, 1천여 곳의 초등학교와 70여 곳의 중등 이상의 학교를 세웠는데, 이들 학교에는 각각 1만 6천명, 4천명의 학생이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문화사업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거나 혹은 중국인에 대하여 순수한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복음을 서양의 문화와 동일시하고 그 문화를 중국에 심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중국인들의 눈에는 선교사들의 문화사업이 중국인들에게 서양문화의 우월감을 심어주어 서양 자본주의 국가를 숭배하도록 하기 위한 문화적 식민지화의 노력으로 비추어 졌으며 그러므로 반기독교 운동기간 중,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의 저택과 예배당만 불태운 것이 아니라 병원과 학교까지 불태우고 파괴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B. 중국문화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

선교사가 그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의 문화를 파악한다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선교사들에게는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선교사들은 열심으로 언어를 연습하였으며 또 문서사역 및 교육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러한 활동이 중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중국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선교과정에서 언제나 서구적인 관점을 고집했으며 선교방법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 시켰다.
물론 선교사들은 중국인의 악습을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 분야에 많은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성적 부도덕성, 일부다처제, 전족, 도박, 우상숭배, 아편, 조기결혼과 이혼, 여성해방 등에 대한 선교사들의 공헌은 절대로 과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선교상 많은 시행착오를 낳았으며 반 기독교 운동의 불씨로 작용하였다.

1. 문화적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은 선교

중국인은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중화사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중국인이 가장 문명한 민족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이들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고 손상시키는 선교방법을 사용하였다.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자랑하며 가장 높은 자존심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선교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반격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서양의 선교사들을 미개인으로 생각했는데 선교사들은 오히려 중국인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한데서 큰 과오가 발생했다.
먼저, 선교사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무력에 편승하여 선교의 발판을 넓혀감으로서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불평등 조약에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서구의 무력에 의하여 선교의 권리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많은 부분에 걸쳐 열강의 무력에 의존하였다.
1724년 옹정제의 금교칙서 이후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금지되어 왔는데 이러한 100여 년 간의 금교는 아편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졌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 남경조약이 맺어졌으며 이 남경조약 가운데 특별히 종교조항이 있지는 않았지만 외국 영사와 상인들에게 개방된 5개항과 치외법권의 혜택은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의 선교가 재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이 남경조약의 조문화 과정에 선교사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조약을 기초한 사람은 선교사 모리슨(J. R. Morrison)이었으며 조약의 중문 원고는 선교사 구츨라프(C.Gutzlaff)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그후 계속된 불평등 조약들, 즉 망하조약(望廈條約), 황포조약(黃浦條約) 등에도 선교사 브릿지맨(E. C. Bridgman) 과 파커(P. Parker) 그리고 카레(Callery)가 개입되었다.
다음으로 중국의 내지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도 아편전쟁이었다. 1856년 광서 서림에서 처형당한 샤쁘들렌 선교사를 문제삼아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을(1856-1860)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청정부는 중국과 영국 프랑스 사이의 조정에 나섰던 러시아와 미국과도 천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1858년 6월 천진 조약에서 각국은 11개의 새로운 개항장, 내지로의 무제한 여행, 북경에서 거주할 수 있는 치외법권, 홍콩근교의 중국영토, 아편의 합법화, 선교회의 보호, 배상금 등을 요구했다.
실제적으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서구열강들과 계속적으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불평들 조약의 조문 가운데는 언제나 선교 권에 대한 항목이 포함되었으며 서구의 선교사들은 강제로 얻어낸 선교의 자유를 힘입어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지만 그 배후에 있는 중국인들의 심정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국인의 눈에 서구선교사들은 서구의 세력을 확장키 위한 앞잡이로 보였으며 미움의 대상이었다.
둘째로, 선교사들의 무례한 복장이나 거동도 중국인들의 반발심을 불러왔다. 당시 중국의 사회계층은 황제, 관료(上部 神士層), 일반신사(下部 神士層), 평민 등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들 집단은 서로 엄격히 분리되었다. 신사 층의 사람들은 장식과 정대(頂戴) 및 의복에서 평민과 달랐는데 의복은 1품 관의 경우 아홉 마리의 이무기가 그려진 조복을 입었고 신사 층은 푸른색의 띠를 두른 검은 도포를 입었다. 아름다운 장식과 말안장의 장식도 평민에게는 불가하였으며 이 규정을 위반하면 처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교사들은 의제(儀制)와 복장의 규정을 남용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면 귀주의 파우리(L. Faurie)는 자주 순무(巡撫)전용의 자색 가마를 타고 의장을 성대히 하여 시가지를 활보하였으며 더욱이 1861년에는 자주색 가마를 타고는 북 치는 사람을 이끌고 거리에서 요란스럽게 천진 조약과 북경조약의 체결을 경축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은 중국인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었으며 후에 귀주 교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셋째로 선교사들의 중국내정 간섭도 중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였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적 신분을 이용하여 중국의 특권층과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며 중국의 관리들에게 직접 문서를 보내거나 사람을 추천하고 임명을 종용하였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관리에 대해서는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독일 선교사 앤저(Anzer)는 지방관서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호령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관리는 상급기관에 보고하고 처벌과 해임까지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으며 기독교를 배척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예전의 집행에 있어서도 중국인의 높은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성찬식에서 회중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떡과 잔을 받게 한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외국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것은 곧 외국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오해를 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점은 선교사들이 얼마나 문화적인 면에 무관심하였으며 중국인의 자존심 문제에 대하여 무지했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시악(李時岳)은 기독교의 배척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단지 외래종교라는 사실 때문에 중국에서 배척받은 것이 아니다. 중국은 결코 외래종교를 배척한 적이 없다. 불교와 마니교는 모두 외래종교이며 기독교의 한 지파인 경교도 외래종교였지만 배척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말 마태오 리치 등이 중국에 서양문명을 소개했을 때도 그들은 중국인의 우대와 환영을 받았었다. 그러나 선교가 식민주의와 혼합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레닌도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들이 중국에 온 것은 단지 횡재를 위해서였다. 저들은 자신의 소위 문명을 이용하여 사기, 약탈과 진압을 행했던 자들이고 사람들에게 해독을 주는 아편의 권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중국과 전쟁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저들은 선교의 허튼 소리로 약탈전쟁을 은폐한 사람들인데 중국인이 어찌 그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교사들은 자존심이 가장 강한 중국인에 대하여 자존심의 문제를 간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짓밟는 선교방식을 사용한 것은 중국선교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변화를 강요한 선교

선교사들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이려면 자국의 문화와 전통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민족성을 고려하지 않고 선교에 있어서 자국문화의 냄새를 지나치게 풍긴 탓이었다.
실제로 선교재개 초기의 선교사들은 공자를 개종의 우선적인 적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신사 층의 적극적인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한 예로 왕병섭(王炳燮)은 "중국사람들은 중국백성을 위한 중국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마땅히 중국 성인의 가르침을 존중해야 한다. 이는 외국 백성을 위하여 외국의 가르침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과 같다" 고 주장하면서 전교(傳敎)에 대하여 강하게 저항하였다.
선교사들의 가르침 가운데 중국인의 변화를 강요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가르침은 중국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은 금수와 같고 무모(無母)는 금수만 못하다'는 전통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아버지는 노형(老兄)이라 부르고 어머니는 노자(老姉)라고 부르니 아버지도 아들도 없다' 또는 '예수의 가르침은 상하존비(上下尊卑)의 구분이 없고 무군무부(無君無父)이다'라는 비난을 받게 하였다.
또 부녀자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유가의 전통은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부녀자는 매우 낮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교당에서는 남녀가 함께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등,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활동하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선교사들도 초기의 한국선교사들처럼 예배당 사이에 포장을 치고 남녀를 구분하여 앉게 하는 것과 같은 문화적 배려를 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매우 유익한 방법이었을 것이지만 그러한 흔적은 없다.
그밖에도 선교사들이 강조한 신기술, 신학문, 의학기술, 새로운 건축 구조, 새로운 사회 구조와 같은 것들은 전통적인 것과 무조건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변화를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중국사회가 원할 때는 이와 같은 선교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오히려 복음전파에 큰 거침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마땅히 중국인들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모든 것을 버려야만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한 것은 변화를 싫어하고 변화에 저항하는 중국인의 특성을 간과한 너무 성급한 선교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지도자의 양성을 간과한 선교

중국은 지도자를 중시하는 나라이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들고 큰 스승은 많은 제자를 둔다. 중국에서는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큰 지도자 하나를 기르는 것이 그 아래 많은 사람을 몰려들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중국인 지도자의 양성에 주력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중국인을 단순히 선교 보조자로만 생각하고 활용하였다. 선교사들은 선교활동 상의 경제와 행정에 있어서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중국인은 거의 고용인과 같이 선교사를 보조하기만 하였다. 더욱이 선교사들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지나치게 독단적이었으며 현지인들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선교사들이 중국교민들을 지나치게 보호한 사실도 중국인 지도자를 기르는데 방해가 되었다. 중국교회의 신자들은 중국인들에게 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를 이용해서 덕을 보려는 쌀 신자들이 많았으며 선교사들은 이들을 이권을 보호하는 데만 주력하였다.
당시 중국의 신자들은 4종류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신교(信敎)로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복하고 사후에 천당에 가기를 바라는 선남선녀들, 둘째는 의교(依敎)로서 교회의 부동산에 의지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부득불 입교한 사람으로 대개 교회의 토지를 부치는 농민과 교회의 일을 관리하는 자들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흘교(吃敎)로서 교회의 하찮은 은혜를 탐내어 교민을 일종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자, 넷째는 투교(投敎), 즉 교회세력에 기대어 타인을 착취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신자들은 대부분 신교와 의교이었으나 소수의 걸교자와 투교자가 선교사의 비호를 받아 교민의 대표를 이루었다.
선교사들은 교민이 비교민보다 높은 사법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결과 교민에게도 치외법권을 적용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동족으로부터 '입교 전에는 쥐와 같더니 입교 후에는 호랑이와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며, 또 교민들의 영신새회(迎紳塞會)와 같은 향촌 축제 기금의 납부 거부운동 등은 신사 층의 지방통치권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중국교회 안에는 중국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이 없었으며 오히려 중국인 기독교인들은 그 동족으로부터 '외국인의 충실한 개들' 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중국내의 교민을 보호하기 위한 선교사들의 순수한 열정은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신자들이 선교사의 보호아래 강탈이나 조세거부, 불공평한 소송결과를 만들어 냄으로 반 기독교 심리를 크게 자극하였으며 존경받는 기독교 인물을 만들어 내는 데는 전혀 실패하였다.
특히 내지 선교회의 선교정책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먼저 모든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내지 선교회의 의욕은 고귀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내지 선교회의 결정적인 약점이 되기도 했다. 저명한 선교 역사가인 라토렛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중국 내지 선교회의 주된 목표는 개종자를 만든 다거나 중국인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가능한 한 빨리 중국의 전지역에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록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복음의 조력자로서 활용하기는 했어도 중국인 목회자를 훈련시켜 세우는 일에는 소홀히 하였다

이러한 내지선교회의 선교 정책은 결코 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과 반발심에서 비롯된 의화단 사건, 또 수 십년 뒤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은 지역 선교의 강력한 거점으로 건물과 교회의 건축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 선교 정책이 내부적으로 허약한 정책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내지선교회는 중국인들에게 많은 저항을 받아 왔으며 1900년 6월 중국황제의 칙령으로 외국인과 기독교에 대한 말살정책이 집행되었을 때에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135명의 선교사와 53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내지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선교방식, 즉 중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변화를 강요하고, 또 지도자를 양육하지 않은 선교는 계속적으로 반 기독교 운동을 야기 시켰으며 기독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데 많은 저해요인이 되었다.
그 실례로 1922년 중국에 NCC 가 창설되었는데 이의 창립취지는 본색교회(本色敎會)를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NCC는 얼마 되지 않아 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으며 1927년에는 16개 교파를 연합한 '중화기독교회'가 창설되어 자치(Self-government), 자립(Self-suppor
ting), 자전(Self-propagation)의 정책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었다. 중국 내에서 일어났던 반 기독교 운동, 즉 1854년 프랑스 선교사 살해사건, 1870년 천진의 박해사건, 의화단 사건, 그리고 1922년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반기독교 운동은 모두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일어난 운동이다.
중화민국 11년(1922년) 3월 9일, 북경에서 반기독교 청년학생들은 '비기독교 학생동맹 선언'을 통하여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도구이며 중국에 절대적인 해가 되므로 추방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같은 해 3월 17일 반기독교 청년 학생들은 '비종교 대동맹 선언'을 통하여 기독교는 사상을 속박하고 청년을 마취시키며 중국의 진보를 가로막는 방해요인이므로 인류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반기독교 운동은 계속되는 전쟁과 조약으로 그들의 오랜 정치 문화적인 우월주의가 좌절감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좌절감은 또한 외세에 대한 반감이 되었으며 이러한 반감은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과 반기독교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인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존심을 크게 상한 중국인들은 명예회복을 위한 의지를 결집시키기 시작하게 되었다.
둘째, 전통적인 미신을 섬겨오던 중국인들은 외래종교인 기독교로 인하여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재해가 있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기독교는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유교와 유교적인 가치질서를 물란 시키는 집단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에게 중국의 문화와 중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연구와 배려가 있었더라면 결코 군함을 타고 선교지에 도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서구 제국주의의 힘을 빌려 선교의 영역을 넓히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문화를 고려하여 좀더 신중하고 겸손한 선교를 했더라면 많은 부분의 반기독교 운동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C. 복음과 중국문화의 충돌에 대한 적절한 대처의 부족

선교사가 아직 회심자가 없는 곳에서 일하기는 비교적 쉽다. 그러나 타문화 권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될 때부터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회심자들이 생기기 전에는 단순히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도지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회심하게 되면 많은 문화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계속해서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는가?"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드려야만 하는가?" 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다.
물론 선교지의 문화 가운데는 복음과 화합할 수 없는 이교적인 것이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이 둘을 공정하게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선교지의 문화와 복음이 충돌하지만 그렇다고 그 충돌하는 문화를 무조건 파괴해서는 안 된다.
중국인에게 기독교의 복음이 수용되기 어려운 점, 중국의 문화와 복음이 충돌되는 부분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는 혼합주의적인 종교의식을 가진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는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배타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실리적이고 현세적인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의 복음은 영적이요 미래지향적이라고 하는 점이다. 셋째는 가족 중심적인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는 다분히 개인 중심적이라는 점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 지상주의의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는 하나님 지상주의, 혹은 교회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1. 혼합주의와 배타주의의 충돌

중국인의 종교관은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 다 같다고 하는 종교 혼합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종교든지 별 저항 없이 다 받아 들여서 기존의 것과 혼합시키는 민족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만 구원이 있으며 예수를 믿음으로서만이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먼저 여기에서 중국인이 수용하기 어려운 복음과 중국 문화의 충돌이 발생된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하여 무조건 중국의 전통 예속을 버리고 천자를 숭배하지 말 것이며 조상을 모시지 말라고 요구하므로 봉건 관신들의 반발과 불만을 초래했다. 중국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므로 복음을 들어보기도 전에 듣기를 거부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오히려 성경에 있는 내용 가운데서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고 그 바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여야 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효도와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 등과 같은 성경의 내용이며 또 십계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2. 실리적 현실주의와 영적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의 충돌

중국인들은 무엇보다도 실리를 추구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내세의 문제보다는 당장 현실의 문제를 더 절실하게 생각하는 다분히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 자체가 영적인 것들을 강조하며 당장 눈에 띄는 어떤 이득을 보장하기보다는 먼 천국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인에게 영적인 가치의 소중성과 성경이 말하는 재림이나 심판, 또는 천국과 지옥과 같은 내세의 문제를 증거 할 때에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현실적인 이득을 보장하기 위하여 소송에 개입한다든지 그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오히려 많은 문제점만 양산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교회를 이용하여 세상적인 이득을 보려는 저질 신자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밖으로는 백성들의 지탄과 국가권력의 반감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가르치는 일이 요청되었다. 추상적인 용어보다는 구체적인 표현, 또는 역설적인 표현이 중국인의 사고 구조에 적절하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은 중국인들에게 피부로 느껴지는 실제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중국의 전통적인 가정에 격언이나 족자를 배열하는 것처럼 산상수훈이나 십계명, 또는 시편의 구절들을 액자나 족자에 넣어 걸어 두거나 춘절이나 명절에 좋은 글을 문설주나 인방에 써 붙이는 것처럼 성경구절을 대신 활용하는 방법 등은 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대치하는 대단히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가운데 이러한 토착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3.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충돌

중국인들은 개인을 경시하고 가족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가족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가르침이 많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와 같은 말씀은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말씀이다. 여기에서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리고 중국인의 가족중심의 의식구조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가 강조되었는데 중국인들은 죽은 조상이 제사음식을 먹고 살아가게 되며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조상의 영혼이 사멸되기 때문에 이것은 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704년 천주교에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자 이는 후에 교황청과 청나라의 불화와 충돌을 야기하기도 하는 등 제사문제는 계속되는 기독교와의 충돌점이다.
물론 제사는 기독교 신앙과 화합할 수 없는 미신적인 의식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지혜롭고 적절한 방법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경우와 같이 제사를 추도예배와 같은 것으로 기능적 대치(functional substitute)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사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리고 묘지를 잘 보살피며, 또한 살아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장려하는 일을 강조하므로서 기독교는 결코 가족이나 효도를 소홀히 하는 종교가 아님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많은 충돌을 피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4. 국가 지상주의와 하나님 지상주의의 충돌

중국인에게 있어서 국가와 정치는 모든 것을 통합하고 지배하는 최고의 기관이요 기능이다. 종교와 사상도 모두 정치에 예속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앙이 국가보다 우선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이며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국가나 통치권력에 대항한 사도들의 행적이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은 기독교가 자국의 백성들을 '국가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사회변화에 민감해야하지만 사회변화를 유도한다는 인상을 주어서 안 된다. 권력자들에게 불안감을 줄 때에 선교는 극심한 타격을 입게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선교사들은 영사 재판권을 빙자하여 중국인들도 입교하면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청조 정부의 권위를 능가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했다. 평민이 일단 입교하면 관부(官府)는 이들에게 잘못이 있어도 문책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은 청조의 통치권력에 큰 타격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일국내에 무수한 자존자립의 적국(敵國)이 출연한 셈이었으며 이는 국가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선교사들은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교민들의 소송사건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872년 직예심주지주오목(直隸深州知州吳牧)의 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지방관이 개인의 공사(公事)에 대한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 중국의 법도입니다. 교민은 중국의 백성인데도 일단 소송이 발생하면 선교사를 호신부(護身符)로 의지합니다. 선교사는 교민이 다른 사람과 소송중이라는 말만 들으면 즉시 공사에 청탁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삼습니다. 따라서 중국관원은 중국의 법으로 중국백성을 다스릴 수 없게 되어 조약문은 공문(空文)이 될 뿐입니다. ...........평민은 교민에게 원한을 품고 그 억울한 감정이 오래되면 반드시 하루아침에 그 억울한 감정을 풀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각 성에서 교안이 번갈아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선교사가 교민을 비호하여 소송사건에 관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소송간섭 행위는 각지에서 보편화하였으며 이는 중국의 사법권의 침해로서 중국인들의 많은 불만을 야기 시켰다. 물론 이와 같은 소송 간섭행위는 단기적으로는 교민의 증가에 기여하였지만 또한 교민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유진 라미(Eugene Lamy)와 파우리(Faurie) 선교사는 1863년부터 1865년까지의 귀주성의 포교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곳에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가 왜 믿는지 모르며, 다만 당시의 사회조류를 쫒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 종교를 가지면 다른 사람의 침해를 면할 수 있고, 소송 중에 선교사가 그들의 유력한 보호자가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또 다른 보고서에도 같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신도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일에 대한 지지를 구하기 위하여 존재하며 부분적으로는 어떤 중한 공고(控告)의 결과를 도피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더 나아가 선교사들은 교민들에게 치외법권까지 적용시키려고 하였다. 중국 근대사가 모스(Hosea B. Morse)는 "선교사는 교민이 마땅히 비 교민보다 한 차원 높은 사법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신념은 제거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신념은 교민들로 하여금 국가의 권위를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와 신사 층의 지방통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교민들의 영신새회(迎神賽會)와 같은 향촌 축제 기금의 납부거부 운동 등은 반기독교 심리를 가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도 선교사들은 이러한 중국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지방관리나 중국 국가기관을 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본국을 통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은 모두가 국가 지상주의와 하나님 지상주의 충돌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될 수 없었으며 기독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영원한 외국 종교로 남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고찰하여 본 결과, 일부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국선교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국인을 사랑하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본국을 떠나 열악한 환경의 중국으로 갔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선교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좋은 문화인류학자는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문화적인 몰이해는 선교상의 많은 부작용을 야기했으며 중국인들의 반감을 초래하여 선교의 결과를 풍성하게 하지 못했다.
선교사들과 중국교회는 1920년대, 대대적인 반기독교 운동을 경험하면서 이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후 본국정부와의 연관을 단절하기 위한 노력과, 또 기독교를 타계적이고 관념적이며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중국 본색교회를 중심으로 전개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Ⅴ. 결 론

2세기에 걸친 개신교의 중국선교는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성공적인 선교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투자된 선교적 자원에 비하여 그 결실이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문화적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서구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복음과 문화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서구의 문화를 이식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존심이 가장 강한 중국인들에게 그 자존심을 짓밟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변화를 가장 싫어하는 민족에 변화를 강요하였고, 또한 지도자를 중시하는 민족에 지도자를 키우는 일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과 문화의 충돌에 대해서도 인식이 부족하였으며 이를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혼합주의적인 종교의식과 실리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가치관, 가족 중심적이고 국가 지상적인 중국인의 의식구조에 이와 정 반대가 되는, 구원에 있어서 배타적이며 또 영적 미래지향적인 가치관, 개인적이요 하나님 지상주의의 복음을 심는데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므로 많은 선교적 자원을 낭비하였으며 또 중국인의 심한 반발과 기독교에 대한 저항운동을 유발시켰다.
그 후, 1949년에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모택동(毛澤東)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창설하므로 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 주의를 행동의 지침으로 삼았으며 선교사를 추방하고 중국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므로 중국선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고 중국교회는 수난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모택동이 사망한 후 1978년 정권을 계승한 등소평(鄧少平)은 제12차 전인대의 개막식을 통해 중국식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하므로 현대화된 사회주의 부국강병을 국시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이의 일환으로 중국 공산당은 개방과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현재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불안해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개방 이후 지금까지, 너도나도 중국에 대하여 무계획하고 무분별한 선교를 해 왔으며 그 결과 중국 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선교를 자제해 줄 것을 여러 번 요청한 바 있으며 또한 선교의 제약을 강화하는 추세에 있다.
급격하고 무모한 선교는 오히려 선교의 문을 굳게 닫게 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어렵게 열어주신 중국선교의 문을 닫히게 하고 새로운 선교의 기회를 또다시 잃어버린다면 이는 전적으로 우리들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이제 중국선교는 철저한 연구와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실행되어야하며 결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교회와 기관이 연합하여 이단의 중국 진출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중국인들은 특별히 이단에 약한 민족이다. 그들의 미신적이고 종교 혼합적인 문화는 모든 종교를 한데 섞어버리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인들에게 따분한 설교나 자기수양의 거룩한 말씀들은 맥을 쓰지 못하지만 재미나 사술이 가미된 사이비는 마약보다 더 무섭게 저들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중국인들 가운데 전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문화대혁명 이후에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젊은 세대들인데, 이들은 정신적으로 아무런 종교적 면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예의 범절과 건강한 가치관도 없는, 정신과 영혼의 공백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또한 이들은 외부세계에 대하여 좋은 것은 수용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주체적인 의식도 없으며 외국의 것에 대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다.
이와 같이 백지와 같은 그들의 정신과 영혼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 하는 것은 중국의 장래를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만약 이러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이비 기독교가 먼저 전해지고 이단들이 먼저 받아들여진다면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날 것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중국선교를 수행하는 모든 교단들은 필요 없는 경쟁을 지양하고 서로 협력하여 이단이 끼여들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없애야 할 것이다.
다음은 선교사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하여 중국어는 물론 중국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하에 선교를 수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선교의 문제점이 주로 문화적인 면에서 발생하였음을 인식할 때에,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사들의 문화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중국선교는 지금까지 서구 선교사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선교의 강도에 비례하여 기독교에 대한 저항운동도 커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우에 그렇겠지만 특히 중국선교는 철저히 문화적 선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선교사의 중국문화에 대한 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신중하고 차근차근히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 늦더라도 한발한발 정확하게 선교를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국인에게 효과적이고 적절한 선교방법이다. 급하고 변화를 강요하는 듯한 선교는 삶의 모든 영역을 정치에 예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정부를 불안하게 하고 또 변화를 원치 않는 중국인들에게 저항감만 불러올 뿐이다.
그리고 만약 선교사들이 선교상의 시행착오를 일으키므로 다시 중국인들의 감정을 자극시켰을 때, 그것을 만회하는 일은 현재 기독교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으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중국의 경우, 대단히 출혈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좀 늦더라도 천천히, 그러나 신중하고 정확한 선교를 진행시켜 갈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 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 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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